후나다(선전원) 일본경제기획청장관은 지난 5일 기자회견에서 『헤이세이(평성)경기의 전환점(경기의 정점)은 91년 1∼3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혀 91년 봄부터 가을에 걸쳐 『경기는 확대국면』이라고 계속 고집해왔던 경제기획청의 판단이 잘못이었음을 공식 시인했다.경제가 거품위에서 춤을 추었던 당시 업계와 민간경제전문가들이 『이제 호경기는 끝났다.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전혀 이에 동의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일본정부는 「헤이세이경기」가 전후 최장이었던 「이자나기경기」(65년 11월부터 70년 7월까지 57개월)을 능가하는 최고·최장의 경기라고 우겼다.
그 결과 대책마련은 늦어졌고 이제 거품경제붕괴의 후유증이 심각해 「헤이세이불황」 「세기말불황」으로까지 불리고 있다.
그런데 당시 경기판단을 잘못한 큰 요인중의 하나가 한 정치인의 공명심 때문이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당시의 오치(조지통웅) 경제기획청장관은 「이자나기경기를 뛰어넘고 싶다」는 욕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86년 9월까지만 계속되면 이자나기경기를 능가하게 되고 이런 사상 최고·최장의 호경기시대를 이끈 경제기획청장관이었다는 개인적영예에 너무 집착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장인인 후쿠다(복전규부) 전 총리는 이자나기경기때의 대장성장관으로 경기확대의 주역이었다. 때문에 그는 평소 『장인의 기록을 뛰어넘고 싶다』고 말하곤 했었다는 것.
여기에 일부 경제관료의 상관 눈치보기도 한 몫 가세했다. 경제기획청의 한 간부는 『당시 실무진의 분석에서는 경기후퇴를 나타내는 조짐들이 지적됐지만 어쩐지 장관에게 보고하는 단계에서는 변질되곤했다』고 실토했다.
헤이세이경기가 언제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분분하다. 장관 발표는 있었지만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는 담당 위원회의 정식 결정이 나야한다.
그러나 한 경제각료의 공명심이 정부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국민생활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교훈을 이번 일본의 경기논쟁에서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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