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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달」에/김성우(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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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달」에/김성우(문화칼럼)

입력
1992.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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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은 「윤동주의 달」이다. 「별헤는 밤」의 시인 윤동주는 12월30일이 생일이요 살았더라면 만 75세가 된다. 28세의 아까운 나이로 죽은 이 시인을 기려 이 한달동안 시낭송회,강연회,도서전시회,윤동주시 창작국악곡연주회,윤동주시 낭송콩쿠르 등의 행사가 있었고 그의 「서시」가 신작 가곡(변훈곡)으로 발표되었다.얼마전 어떤 조사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김소월이고 그 다음이 윤동주라고 한다. 생전에는 무명이던 시인이 죽어 나이를 먹는동안 이렇게 대성했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중 독립운동의 혐의로 붙잡혀 일본의 감옥에서 광복을 반년 앞두고 옥사했다. 이 항일시인 윤동주의 시가 일본의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사실은 몇해전 일부 알려지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른다. 「윤동주의 달」을 맞아 이 기특한 일이 새삼 상기된다.

1990년 4월부터 일본의 고교에서 쓰고 있는 치쿠마출판사(축마서방) 편찬의 문부성 검정교과서 「현대문」에 이바라기(자목) 노리코라는 여류시인이 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한편의 글이 들어있다. 윤동주를 소개한 이 글속에 「서시」 「쉽게 씌어진 시」 「돌아와 보는 밤」 「아우의 인상화」 등 4편의 시가 전문인용되어 있다. 필자는 윤동주의 시를 『20대가 아니면 절대로 쓸 수 없는 청렬한 시풍』이라고 말하고 『오래 살수록 수치많은 인생이 되어 이런 풍으로 절대로 쓰여지지 않게 된다. 시인이에게는 요절의 특권같은 것이 있어서 젊음과 순결을 그대로 동결시킨듯한 맑음이 항상 수선화같은 좋은 향내를 풍긴다』고 썼다. 그러고는 『요절이라지만 그는 사고나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후쿠오카(복강) 형무소에서 내용을 알 수 없는 주사를 계속 맞았다고 한다』고 고발하면서 언젠가는 옥사의 진상이 명료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분개한다. 이 글에 인용된 시는 1984년 이부키고오(이휘경)씨 번역으로 나온 윤동주의 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전재한 것이다. 이부키씨가 윤동주의 일본에서의 족적을 추적했을 때 일본 검찰의 비밀주의,은폐주의의 벽이 너무 두껍더라는 말을 들었다고 이바라기 시인은 통탄한다. 이것이 일본 교과서에 나오는 일본인의 글이다.

이 글이 교과서에 등장하기까지에는 치쿠마 출판사의 국어 편집장인 노가미다쓰히코(야상용언)씨의 노력이 컸다. 그는 이부키씨의 번역시집으로 윤동주의 시를 처음 대하고 감성넘친 아름다운 언어에 감동했고 『자기 나라 말을 빼앗긴 역경속에서 그렇게 고운 마음을 노래한 시를 학생들에게 꼭 알리고 싶던』 차에 이바라기 시인이 1986년 펴낸 에세이집 「한글에의 여행」에서 위의 글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고군분투하여 우여곡절 끝에 문부성의 검정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한국 저항시인의 문학이 일본 학교에서 교육되는 역사적 사건의 시발이었다. 이 출판사에서는 윤동주 외에 이육사의 시집도 번역 출간했다.

고교 「현대문」의 검정교과서는 일본에 21종이 나와있고 치쿠마 출판사의 것은 현재 전국의 1백50여개 고교에서 사용중이다.

올해 66세의 이바라기 노리코 여사는 오사카(대판) 태생으로 현재 도쿄에 거주하면서 「대화」 「진혼곡」 등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이다. 시잡지 「도」의 창간동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윤동주의 시엔 맨 처음 끌리기 시작한 것은 그의 사진을 보고 티 하나 없는 청결한 미청년의 인상이 선명하고 강렬했기 때문이었다고 앞의 글에서 밝혔다.

「윤동주의 달」을 맞으면서 나는 이바라기 여사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을 묻는 편지를 썼다. 즉각 또렷한 한글로 적은 회신이 왔다.

여사는 16세때 김소운역의 「조선민요선」을 읽고 한국의 아름다운 시심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종전후 일본이 한국에 대해 범한 죄를 깨달았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의 현대시를 읽고 싶은 마음으로 문화센터에서 한국말을 약 10년간 배웠다. 1978년 「한국역사를 찾는 여행」이라는 단체여행에 참가한 이래 한국은 10회 정도 방문했다. 1990년에는 「한국 현대시선」을 일어로 번역출간해 요미우리(독매) 문학상을 받았다. 윤동주에 대한 글이 교과서에 실린후 세이조가 쿠엔(성역학원)고교의 한반 학생 전원한테서 독후감이 보내져왔다. 감명 깊었다. 그 밖에 후지(부사)고교 등 많은 학교에서 반향이 있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그의 시 「별 헤는 밤」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윤동주의 별에도 봄은 오는가. 무덤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윤동주의 이름은 그의 죽음의 땅 일본에서 소생하고 있다.<본사 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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