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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선90도」 예의… 4년 정치내조/새 퍼스트레이디 손명순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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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선90도」 예의… 4년 정치내조/새 퍼스트레이디 손명순여사

입력
1992.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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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성격 “한국적 부덕상”/자수성가 마산 기업인 장녀… 이대약대 수석 입학/“불우한 계층 돌보는게 내일”청와대의 새로운 안주인이 될 손명순여사(64)는 남편 김영삼 대통령당선자가 14대 대통령으로 확정된 19일 아침에도 특유의 「9선90도」 절을 하기에 바빴다.

보랏빛이 도는 옥색 한복차림으로 축하객과 보도진을 맞은 손 여사는 이틀째 잠을 거의 못자 피곤한 가운데도 여전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손 여사에게는 길게는 40년의 정치내조생활이,짧게는 지난 1년동안의 「선거운동원」 생활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40여년동안 반정치인으로 살아온 손 여사였지만 지난 1년여는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운 하루하루였다.

야당 총재의 부인으로서 15년,여당 대표 및 총재의 부인으로서 3년 가까이 지낸뒤 남편이 집권 여당의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지난 5월부터 손 여사의 「대선장정」도 함께 시작됐다.

원래 수줍음이 유달리 많고 좀처럼 남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손 여사였지만 상도동 안방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김 후보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구석구석 챙기로 찾아다녔다.

이러는동안 전국을 3차례나 순회하게 되었고 만나는 사람들과 1대 1로 찍은 사진만도 무려 1만장에 달하게 됐다.

과거 중앙정치무대에서 활동하느라 지역구 관리가 어려웠던 남편을 대신해 혼자서 지역구를 돌봐야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시장 사회복시설 등을 하루 10∼15곳 찾아다니며 소문나지 않는 유세에 힘썼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잠행유세」라고 불렀다. 9선 관록의 남편을 수십년 뒷바라지해오는 동안 본인도 상체를 90도로 숙여 절하는 습관이 몸에 뱄다해서 김 당선자가 이름붙여준 「9선90도」 절이 이 과정에서 어느새 손 여사의 트레이드마크로 회자됐다.

손 여사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수행팀들이 좀더 「직접적인 호소」를 주문했지만 『겸허한 자세로 결과를 받아들이겠으니 지도편달 바란다』는 평범한 말과 함께 90도의 절만 계속했다.

그러나 결국 모나지 않은 손 여사의 방법이 조용하고 침착한 「한국적 부덕」을 유권자들에게 심어주는데 더욱 효과적이었음은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계란형 얼굴에 서너줄의 굵은 눈가주름이 여느 이웃집의 나이많은 인자한 아주머니와 조금도 다름없는 손 여사의 모습에서는 젊었을 때의 「단정한 미모」가 엿보이기도 한다.

누구든지 쉽게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눈웃음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손 여사가 청년 김영삼을 처음 만난 때는 지난 51년 2월초.

「할아버지가 위독하니 빨리 귀가하라」는 전보를 받고 부산에서 학도의용대원으로 근무하던 김 청년은 급히 거제 본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 전보는 김 청년을 장가보내기 위한 거짓내용이었고 결국 김 청년은 부친 홍조씨의 친구 손에 이끌려 마산 경향고무 손상호사장(77년 작고) 집에서 손씨의 장녀 명순양과 대면하게 됐다.

밀양이 본관인 손 사장은 당시 자수성가한 마산의 대표적 기업인. 그의 경향고무는 5백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군복·타이어·고무신 생산업체로서 손 사장에게 마산 갑부의 명예를 안겨준 업체였다.

손 처녀는 29년 2월25일 손 사장과 감덕순씨(85·과천거주) 사이의 2남7녀중 장녀로 경남 김해시 진영읍 신용리에서 태어났다.

진영보통학교를 졸업한뒤 42년 경남 최고 명문중 하나인 진주고녀를 수석 입학할 정도로 손 처녀는 남달리 총명했다고 한다. 2학년때 집에서 가까운 진해고녀로 전학한뒤 광복과 함께 이 학교가 마산고녀로 합병돼 48년 마산고녀를 졸업했다.

여고졸업과 함께 이화여대 약대를 수석으로 입학했던 손 처녀는 김 청년을 만났을 때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손 여사는 김 청년이 『잘 생기고 의리와 뚝심이 있어 보이면서도 자상했다』고 당시의 인상을 회고했다.

결혼식은 선본지 한달후인 51년 3월6일 신부 가족들이 다니던 북마산의 문창교회에서 조촐하게 치렀다. 결혼후 손 여사는 바로 거제 시댁으로 들어가 물동이 이는 법부터 멸치건조법에 이르기까지 어촌 아낙네의 생활을 그대로 배우고 실천했다.

이어 같은해 여름 부산 토성동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대신동에 전쟁중 임시교사가 설치되자 대학공부를 계속했다. 이대가 기혼자 학생을 인정하지 않아 혹시 혼인 사실이 알려질까봐 무척 마음 졸였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은사인 학과장이 결혼여부는 물론 남편의 이름과 가족까지 모두 알고 있어 놀랍고 고마웠다고 덧붙인다.

결혼후 손 여사는 남편이 곧바로 정치일선에 뛰어드는 바람에 뜻밖에 40년 가까이 파란만장한 정치인의 아내역할을 맡게 된다.

남편이 54년 26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기쁨을 누린 것도 잠깐. 이후 김 당선자가 민주주의 투사로 각광받게 되면서 손 여사는 안팎으로 몰려드는 고난과 역경으로부터 가정을 보호하고 남편들 뒷바라지해야 하는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야했다.

야당 투사를 사위로 둔 탓에 친정아버지의 사업체가 갖은 압력을 받아 결국 지난 60년 문을 닫게 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을 때는 혼자 한없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지난 80년대초 남편이 군부세력에 의해 수년간 연금되어 있다 20일간의 단식 투쟁으로 항거했을 때는 차라리 본인이 단식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길 정도로 깊은 아픔을 느꼈다.

그런 와중에서도 손 여사는 2남3녀의 자녀를 모두 훌륭히 키워냈다.

또 상처하신 시아버지의 재혼을 손수 나서 성사시킬 정도로 효성이 높다는게 주위의 평이다.

시래기국과 잡곡밥을 「상도동 식단」이라고 소개하는 손 여사는 1주일에 1∼2회는 손수 시장을 보며,특히 시금치 아욱 근대 배추 등의 야채를 계절따라 번걸아 식탁에 올려 남편의 식성을 맞추고 있다.

상도동을 찾는 사람들은 손 여사가 햇배추로 끓여낸 배추국을 「별미」로 여기고 있다.

손 여사는 『저는 남편이 어떤 일을 하든 부인이 너무 나서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라며 소리나지 않는 내조론을 펼친다.

그러나 퍼스트레이디로서 할 일은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특히 『불우한 고아 노인 근로여성들을 위해 뭔가를 꼽 해보이고 싶다』는 것이 손 여사의 소망이다.<신효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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