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김시대 사실상 종언/“끝내 경론 못펴고…” 울먹인 고별사/“이제 정치사 쓰고 싶다”김대중 민주당 후보가 19일 의원직 사퇴와 정계은퇴를 선언함으로써 한국정치사의 굵은 가지를 이루었던 「양김시대」가 종언을 고했다.
김 후보는 투표일인 18일 하오에 패배를 예감한듯 『부산사건이 심상치 않다』는 뜻을 측근에 밝혔다. 그래도 마지막 기대를 놓지않고 당사에 나와 초반 개표결과를 지켜보다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간 김 후보는 역전 가능성이 무산된 19일 새벽 0시30분께 조승형 비서실장을 조용히 불렀다. 응접실에 들어서는 조 실장을 붙잡은 기 후보는 소리죽여 어깨를 들썩였다. 『40년동안 준비하고 꿈꿔온 것들을 당당히 펼쳐보고 싶었는데…』라고 말끝을 맺지 못했으나 조 실장은 그것이 「은퇴」의사임을 직감했다.
김 후보는 이어 기자회견문을 구술했고 부인 이희호여사는 애써 울음을 삼키며 이를 받아 적었다.
그는 이 회견문을 읽음으로써 지난 30여년간 굽이치는 한국정치의 한복판에 서서 고난과 영욕의 세월을 견뎌온 마지막 꿈을 이루지 못하고 파란만장한 정치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람들은 그를 인동초에 흔히 비유한다. 긴긴 겨울을 설한풍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죽지않고 견뎌 초여름 잔잔한 꽃을 피워 올리는 인동초처럼 고난으로 점철된 정치역정에도 꿋꿋이 일어서서 정의와 자유를 외쳐온 외길인생에 대한 경의에서다.
김 후보는 정치입문 때부터 험난한 길을 걸어야만 했다. 1925년 12월3일(음력) 전남 신안군 하의도 후광리에서 중농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당시 명문이던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해운회사와 조선소를 경영해 촉망받는 청년사업가가 되었다.
그러나 보다 큰 경영을 위해 정치에 뜻을 두고 54년 목포에서 3대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인제에서 4·5대에 잇달아 낙선하는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다.
불운은 계속돼 61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된지 사흘만에 5·16 쿠데타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진가는 63년 목포에서 6대 의원에 당선되면서부터였다. 초선으로서 일찌감치 경제통으로 이름을 날렸다. 64년 김준연의원 구속 동의안을 놓고 5시간19분동안 물 한모금 안마시고 행한 그의 연설은 지금까지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그는 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의 라이벌인 김영삼씨를 누르고 막판 역전승을 거둬 길고 긴 양김시대를 개막했다.
71년 3선을 노리는 박정희대통령에게 맞서 영·호남 구별없이 전국적인 「김대중 열풍」을 몰고 왔으나 46% 득표로 95만 차이로 아깝게 패배했다.
그의 정치적 시련은 이 때부터 밀려오기 시작했다. 교통사고를 위장한 살해기도를 가까스로 모면했으나 한쪽다리를 평생 절어야 하는 상처를 입었다.
박 정권의 72년 유신 선포이후 그는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발한 반유신·독재투쟁을 전개했다. 71년 대선이후 그를 눈엣 가시같이 여기던 박 정권은 73년 동경 납치사건을 일으켰고 그는 사전 정보를 입수한 미 정보기관의 제지로 수장의 위기를 모면했다.
이 사건이후 반유신 투쟁이 불붙었고 그는 반유신 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74년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참여,이듬해 「3·1 구국선언」을 주도한 혐의로 78년 12월27일까지 3년간 복역한뒤 형집행 정지로 석방됐으나 계속해서 가택연금되었다.
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복권된 그에게 봄은 너무 짧았다. 신 군부세력은 그를 박해했고 그의 구속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촉발제가 됐다. 「내란 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죽음앞에서도 군부세력과의 타협을 거부했고 국제여론과 미 정계의 도움에 힘입어 2년만에 구명돼 미국에 망명했다.
망명시절 미 하버드대에서 「대중경제론」을 집필하는 등 활발한 연구활동을 했고 85년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했으나 자택에 연금됐다.
그는 85년 2·12 총선의 신당 돌풍에 힘입어 해금됐으나 사면복권이 안돼 정치활동이 금지된 상태에서도 민추협을 중심으로 민주회복운동에 나서 끝내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냈다.
87년 후보단일화에 실패해 평민당 후보로 두번째 대권에 도전했으나 다시한번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그는 4·26 총선에서 여소야대를 가져오면서 제1야당의 총재로 재기했다. 또한 91년 야당 통합으로 민주당을 탄생시키고 3·24 총선에서 다시한번 3당 합당으로 깨진 여소야대를 이뤄냈다.
그는 총선 직후부터 「뉴DJ」플랜을 통해 자신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지우고 정당한 평가를 받고자 세번째 대권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또다시 패배했다.
김 후보는 『정치를 그만두면 우리 정치를 정리하는 정치사를 쓰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맡긴채 우리의 현대정치를 평가하는 작업을 할 것 같다.<황영식기자>황영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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