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고난에도 흔들림없는 낙천가/뜨거운 민족애엔 경외감유세를 마치고 밤 11시가 넘어서야 돌아오는 남편을 바라보면 안쓰럽기 한이 없다.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 때문에 남편은 『잠좀 실컷 자보는게 소원』이라고 말한다. 하긴 젊은 비서진들도 체력이 달려 쩔쩔매는 판인데 그인들 어찌 고단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루 4시간 남짓 수면을 취하고 나면 남편은 결코 눕는 일이 없다. 차안에서 가끔 토막잠을 자면서 피로를 푸는 것이 고작이다. 바쁜 유세,힘든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번도 짜증을 내는 일이 없는 낙천가이다.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남편은 꿈많은 청년이었고 촌음을 아껴 책을 읽는 독서광이었다. 게다가 매우 성실했으므로 나는 그의 꿈이 꿈으로만 끝나지 않으리라는 강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1962년 5월10일 결혼식을 올린후 신혼 9일만에 남편이 군사정부에 의해 연행되어 생이별을 한 것을 시작으로,격동의 역사와 함께 참으로 숱한 일들이 힘겹게 펼쳐졌다. 71년 막강한 박정희정권에 맞서 선거열풍을 일으켰던 남편,동경 납치사건,80년 내란음모사건과 사형선고,투옥과 망명생활,오랜 연금과 감시속에 지내야 했던 고독했던 시간들….
그러나 바위가 스며든 물을 머금어 비로소 부드러움 속에 단단함을 다지듯 나는,남편과 고난을 함께 하면서 흔들림없는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었다. 사형선고를 받아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남편은 『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겪은 고난과 희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며 눈물짓곤 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항상 우리 때문에 고초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잊지말고 마음으로나마 위로해주라』고 당부하곤 했다.
엄동설한이 되어서야 소나무의 절개를 알 수 있다는 옛 성현의 말씀도 나는 남편을 통해 배웠다. 남편은 61년 군사정권이 민정으로 이양할 때 공화당에 입당하라는 회유를 뿌리쳤고,80년 사형의 위협속에서도 대통령 이외에는 어떤 자리도 내줄테니 복종하라는 전두환정부의 제의도 마다했다. 남편은 민주주의를 외치다 죽어간 선량한 시민들의 죽음과 국민들을 결코 배신할 수 없다는 사람이었다.
지조가 땅에 떨어지고 변절이 합리화되는 세상이라지만 나는 굳게 믿는다. 숱한 고난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있기에 이 세상엔 정의와 진리의 등불이 한번도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남편은 항상 책을 읽고 연구하는 천성적인 노력가이다. 그는 감옥생활,미국망명시절,연금기간 모두를 책과 함께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성과물이 바로 1984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출판된 「대중경제론」이다. 남편의 경제이론,정책에 대한 식견을 알게 해준 것도 바로 이 책이었고 남편이 국회의원 시절 야당의 경제통이었다는 기억을 새삼 일깨워준 것도 이 책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 대통령이 될 사람이 갖춰야할 자격으로서 여러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지조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생활이 깨끗해야 한다. 경제를 살릴 실력과 비전을 갖춰야 한다. 국제화시대에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에 지지않는 당당한 외교역량을 갖춰야 한다… 등등.
그리고 이러한 자격에 가장 걸맞는 사람이 바로 김대중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염치없지만 거기에 살짝 두가지 사실을 끼워 넣고 싶다. 하나는 그가 자상한 가장이며,자애로운 할아버지라는 점이다. 손자·손녀의 재롱을 보며 함께 놀 때가 그는 가장 행복한 모양이다.
또한 남편은 남녀평등 사상에 투철한 사람이다. 남편은 오래전에 우리집 대문에 「김대중이희호」라고 쓰인 두개의 문패를 나란히 걸어주었다. 물론 나를 존중하는 뜻에서 일 것이다. 또 남편은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맏며느리를 불러 『딸만 셋 낳았다고 미안해 해서는 안된다. 사실 난 딸이 더 좋더라』고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남편이 고난과 희생의 정치생활을 하면서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항상 사랑을 가슴 가득 안고 국민 앞에 서 왔다는 사실이다. 나는 남편이 천성적으로 남을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남편이 국민과 함께 펼쳐갈 「대화합」의 새 세상은 모두가 서로 가슴을 터놓고 손을 잡을 수 있는 사회,마주잡은 두손으로 뜨거운 정이 막힘없이 흐르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약력
▲김대중후보의 부인
▲22년 서울출생
▲이화여전·미 스카릿대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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