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들 자기의견 함구… 「감추던 때」 지났다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은 선거때가 되면 침묵의 공화국이 된다.
유세장에서는 확성기 소리가 잉잉거리고 농악대가 칭칭대고 각당 운동원들의 연호소리가 드높다. 게다가 TV연설까지 시작돼 안방도 조용하지 않다. 온나라가 선거 소음으로 가득차 있는듯이 보인다. 그러나 다시 유세장에 가보자. 피켓이나 수기들을 들고 앞자리를 차지한 운동원의 뒤쪽에 무소속의 유권자들이 서 있다. 이들은 입후보자나 찬조연사들이 아무리 고성으로 열변을 토해도 까딱않는다. 좀처럼 박수를 치는 법도 없고 환성을 지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야유나 훼방의 소리도 거의 안나온다. 묵묵히 서있다. 그러다가 연설들이 끝나면 조용히 흩어진다. 이것을 보면 선거분위기가 차분하다 하고 청중들이 질서 정연하다 하고 민주시민의 의식이 성숙되었다고 한다.
흩어져 돌아가는 청중들을 따라 걸어본다. 대부분 끼리끼리 동행을 하면서 도대체 말들이 없다. 방금 보고 나오는 선거 유세에 대해 전혀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자니 다른 잡담도 별로 많지 않다. 서울 근교의 어느 유세장에서는 청중들이 긴 방천 둑길을 따라 줄을 지어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무슨 무언의 시위행렬 이었다.
유세장뿐이 아니다. 각 직장에서나 심지어는 웬만한 가정에서도 특정 후보에 대한 왈가왈부는 금기다. TV연설을 실컷 시청하고 나서는 TV드라마를 보고난것 만큼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니 선거로 온나라가 떠들썩한 것같지만 유세현장만 벗어나면 온국토는 침묵의 땅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왜 그럴까.
선거법이 입을 봉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른다. 선거운동원 아닌 사람은 선거에 관해 입을 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대통령선거법은 보장한다. 선거운동의 정의를 규정한 제33조의 2항에는 「선거에 관한 단순한 의견의 개진은 선거운동으로 보지 아니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랜동안 입을 다물어온 탓일 것이다. 실로 너무나 오랫동안 독재정권 하에서의 함구에 길들여져온 탓일 것이다. 그때 일반국민은 어느 후보자에 대한 찬반의 의견을 감히 입밖에 내지 못했다. 여당을 지지한다 하면 이웃의 지탄이 두려웠고 야당을 지지한다고 하자니 정권의 퍼런 서슬이 무서웠다. 무언이 상책이었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다. 그래도 국민들은 옛날의 공포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슴이 지금도 두근거린다. 언론의 자유가 주어져도 그 자유를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
각 정당에서는 투표를 앞두고 대세를 가늠하기 위해 수시로 여론조사를 하고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선거에 관한한 여론조사가 무의미하다. 자신의 내심을 당당히 털어놓는 조사대상자가 많지않다. 아무리 익명이라도 잠재된 피해의식이 자기목소리를 변성시킨다. 정답이 나올수 없다.
유럽에서는 투표가 완료되면 5분내에 당락의 윤곽을 TV가 발표한다. 득표예상이 개표 결과와 거의 비슷하다. 이것은 투표하고 나오는 사람들을 표본조사하여 집계하는 것이다. 서슴치않고 자기가 찍은 표를 밝히므로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선관위가 투표자에 대한 여론조사를 위법이라고 해석했지만,아니더라도 정직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제 우리는 「닫힌선거」에서 「열린선거」로 전환할 때가 되었다. 자기생각을 자식의 학력고사 점수 감추듯이 무조건 숨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선 내보여도 상관없다. 이번 선거같이 부동표가 많을 때에는 각자의 자유스러운 의견개진이 자기 표를 고정시키는 데 힘이 된다. 특히 선진민주 국가에서 처럼 저명 지식인들의 특정후보 지지 표명은 일반국민의 판단을 돕는다. 모르겠거든 묻자. 선거는 때때로 혼자 풀기에는 너무 어려운 출제다. 아무렇게나 찍기에는 너무 중요한 날인이다.
자기의견의 공개가 이웃끼리 친구끼리의 적대감을 유발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히려 자신을 감춤으로써 온 국토는 불신대 불신의 암투장이 된다. 모두가 남남이다. 자기 은폐가 우리사회를 어둡게 했다. 침묵이 더 화합을 해친다. 화합은 밝은 곳에 있다. 권위주의시대의 습속에서 어서 탈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민주선거를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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