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알고도 은폐… 파문 확산/실적위주 북방외교 허실 드러나/러 “진짜라고 한적 없다”… 항의 근거없어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방한시 우리측에 넘겨준 KAL 007기 블랙박스 내용물을 둘러싼 소동은 러시아측의 모호한 태도와 우리측의 근거없는 기대감 및 치밀하지 못한 외교가 빚은 해프닝인 것으로 그 전말이 드러나고 있다.
정부는 KAL 007기 진상규명의 일환으로 블랙박스를 그동안 러시아측에 끈질기게 요구해왔으며 옐친 대통령의 방한 추진과정에서도 방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옐친 대통령이 블랙박스를 직접 가지고 오도록 러시아측과 교섭을 벌였었다.
이에 대해 러시아측은 우리 정부에 옐친 대통령의 방한 직전까지도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러시아측은 그동안 블랙박스 원본을 한국정부에 넘겨주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견지해오고 있었다. 피격 KAL기는 스파이행위를 했거나,영공침범 자체가 사고 KAL기의 중대 과실로 빚어졌을 수 있기 때문에 블랙박스 원본을 한국에 넘겨줄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우리측은 옐친 대통령이 워낙 「깜짝쇼」를 즐기는 의외성이 많기 때문에 방한시에 블랙박스 원본을 넘겨줄 가능성이 크다는 기대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정상회담과 기본관계조약 서명후 옐친 대통령이 『한국민에게 우의를 표시하기 위해 선물을 가져왔다』면서 블랙박스가 든 가방을 노태우대통령에게 내밀었을 때 우리측은 기대가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며 너무도 쉽게 이 물건이 블랙박스 원본일 것이라고 단정해버렸다. 그 자리서 러시아측 관계자들에게 내용물에 대해 설명을 들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물론 블랙박스 원본 인도를 기대해온 우리측에 블랙박스를 넘겨주면서 아무런 내용설명을 하지 않은 러시아측도 외교관례상 커다란 실례를 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큰 책임은 블랙박스를 넘겨받는 과정에서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고 우리 정부에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정부는 서둘러 블랙박스 원본을 인도받은 것은 대러 외교의 커다란 성과라고 발표하기에 바빴었다.
정부는 옐친 대통령이 돌아간뒤 지난 23일 교통부 확인결과 인도받은 내용물에 비행경로기록장치(FDR)는 아예 들어있지도 않고 조종실 음성기록장치(CVR)는 사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이때 국민에게 이 사실을 공개했더라면 이 사태가 그렇게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란 지적이다. 대신 정부는 이를 극비에 부친채 러시아측에 경위 해명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돼버렸다.
러시아측이 이제와서 『우리는 한국에 블랙박스 원본을 넘겨준다고 한 적이 없으며 옐친 대통령이 한국민에 대한 우의의 표시로 블랙박스 본체와 CVR 사본을 인도할 때 자세한 명세설명을 하지 않아 혼돈과 오해가 발생한 것에 대해 유감』이라고 해명하고 나니 우리 정부는 러시아측에 더이상 항의할 근거조차도 없게 돼버린 상황이다.
물론 옐친 대통령이 껍데기인줄 알면서도 블랙박스 원본인양 속임수는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러시아 내부사정으로 그 내용물을 정확히 모르고 가져왔을 가능성은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블랙박스 원본을 넘겨받아도 이를 독자적으로 해독할 능력이 없어 결국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다시 넘겨줘야 하는데도 대국민용 명분상 원본인도를 추진했으며 그것도 치밀한 계산없이 근거없는 기대만으로 이를 추진했다는데서 이번 소동의 책임소재를 찾아야 할 것 같다.<이계성기자>이계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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