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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아닌 머리로/장명수 편집국 국차장(선택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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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아닌 머리로/장명수 편집국 국차장(선택의 길목)

입력
1992.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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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 연호에 유권자들은 저울질만…「경제대통령,통일대통령」의 꿈을 실은 통일 국민당 유세 버스가 인천으로,의정부로,충주로,제천으로 달리고 있다. 버스는 한국 정치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재벌 총수에서 하루 아침에 정치가로 변신한 77세의 정주영후보,우역곡절 끝에 국민당에 모인 김복동·한영수·김용환·박철언·유수호의원,인기 지식인 김동길의원,인기 연예인 정주일·최불암의원… 버스 안은 다채롭다.

정주일의원은 「이주일의 백만불짜리 코미디」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웃기면서 정주영후보와 인기를 겨루고 있다.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입당한 김복동의원」을 점잖게 소개하고 나서 그는 『김복동 파문이후 민자당에서 나를 「대통령 공동후보」로 오라고 유혹해서 고민중이다. 우선 홍콩으로 나갔다가 살짝 들오라고 한다』고 웃겼다. 그는 점잖게,때로는 야하게,종횡무진 한국 정치를 코미디 소개로 황황용하며 국민당 집회를 즐겁게 한다.

정주영후보는 버스에 타자마자 성대보호를 위해 열심히 「롯데 사탕랑」을 먹기 시작했다. 『정치가 너무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천만에!』라고 고개를 저었다. 『정치를 시작한후 나는 하루하루가 즐겁다. 나는 매일매일 새사람들을 만나 우리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듣고있다. 시장에서 내손을 잡는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경제가 좀 나아질 수 있겠느냐는 간절한 소원이 담겨있다. 나는 한평생 사업을 해오면서도 정치의 기본이 경제라는 사실을 이처럼 절심하게 깨닫지 못했다. 우리 국민은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들인데,정치가 호흡을 못맞춰 주었기 때문에 일한 의욕을 잃게 된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정치를 맡아야 경제기적을 이룰 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나는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하며 세계의 두뇌들과 싸우던 사람인데,지금 우물안 개구리들과 싸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9단과 정치9단이 맞붙였다고 하지만,대통령 선거에서 지지만하던 사람들이 무슨 9단인가. 나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불과 열달전 정치입문을 선언하고 급하게 불러모은 국민당 후보들을 지원하려 총선 유세장을 누볐던 그는 『총선때 국민들과 나는 좀 서먹서먹한 사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국민들이 나를 「정치가 정주영」으로 완전히 신뢰하는 것을 느낀다. 총선때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국민당 득표율이 17.4%에 달했는데 지금 그것을 두배이상 못올린다면 말이 안된다』고 말했다.

유세장에는 수만,수천인파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정 후보의 연설은 짧아서 어디서나 5분이면 끝났다.

그는 복잡하고 길게 말할 필요조차 없다는듯이 단도직입적으로 연설한다. 『지금부터 경제 공부를 하겠다는 직업정치가에게 나라를 맡길 시간이 없으니 경제를 잘아는 정주영을 대통령으로 뽑아 경제기적을 이루자』는 것이 그의 연설요지다.

유세 첫날 인천에서 그는 『인천 부두는 내가 젊었을때 등짐하역을 하던 곳이고 밤마다 인천 빈대와 싸우느라고 밤잠을 설치던 정든 곳』이라고 털어놓으면서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적인 기업을 키워낸 자신의 경제기적,코리언 드림의 성취를 강조했다.

유세장마다 피켓을 흔들며 환호하는 당원들이 있고,「정주영대통령」을 외치는 함성에 천지가 떠나갈듯하다. 그러나 다른 당의 유세장이 모두 그렇듯 청중의 반응은 덤덤하다. 청중은 슬쩍 곁눈길로 단상의 정치인들을 훑어볼뿐 아직 마음을 열지 않고 있다.

87년 겨울 그 뜨근뜨근하던 대선유세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92년 겨울의 유세장에서 한국 정치가 한 고비를 넘겼다는 것을 실감할 것이다. 동원된 청중과 자발적인 청중이 한덩어리가 되어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었던 87년 겨울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좀 허전해 할지도 모른다.

유세장은 미지근하다. 운동원들의 바람잡기 환호도 규격화 되어 소리만 컸지 울림이 없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은 아직 후보들 밖에 없는 듯하다. 어떤 후보도 유권자들에게 불을 붙이지 못했다. 유권자들은 가슴을 닫고 머리 속에서 저울질만 하고 있다. 가슴으로 치르던 뜨끈뜨끈한 선거는 가고,머리로 치르는 선거가 오고 있다는 것이 미진근한 유세장에서 우리가 발견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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