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에 걸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서울 방문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체험이었다. 러시아의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이 나라를 방문했다는 사실도 그랬지만,그보다도 그가 서울에 남기고간 그 「내용」들이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를 실감케 하는 것이었다.먼저 옐친 대통령은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쌍무적인 현안에 관해 상당히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줬다.
옐친 대통령은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사건의 진상을 밝힐 최종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는 블랙박스를 우리측에 넘겨줬다. 또 그는 6·25전쟁에 대한 구 소련의 책임을 시인했다. 남북한 사이의 현안인 상호핵사찰을 촉구하고 북한의 핵개발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북한에 대한 무기공급 중단과 동맹관계 청산 의도를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구체적 선의의 표시는 그가 국회에서 『한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러시아의 중요한 동반자』라고 지칭한데서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옐친 대통령은 국회연설에서 33개의 공동합작 사업과,러시아내 외국기업에 대한 제도적·정책적 배려에 언급함으로써 그가 이번 방문에서 경제협력을 주요의제로 삼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런 한편 그는 이번 서울 방문을 보다 넓은 아시아 정책을 세계에 밝히는 기회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미국과의 전략 핵무기 추가감축 협상 구상과 일본·중국과의 관계발전에 관해 언급했다.
특히 그는 러시아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불가분의 일부』라는 인식하에 이 지역의 국제질서 형성 과정에 참여하겠다는 강력한 의사를 표명했다. 경제적으로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의회(APEC) 참여를 희망했고 『극동지역 경제통합 과정에서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새롭게 주목해야 되는 것은 러시아가 보다 포괄적인 아시아·태평양 지역 다자간 안보협의체 구상을 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지역의 「분쟁방지센터」와 「전략문제연구센터」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자칫 러시아를 경제협력의 파트너로만 생각하기 쉽다. 옐친 대통령의 서울 방문에 관한 관심도 경제문제나 남북한 현안에 관한 러시아의 입장에서만 쏠리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물론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쌍무적인 문제에서 러시아가 얼마나 우리측 호흡을 맞추느냐가 1차적 관심거리라고 해도 잘못은 아니다. 이 분야에 관한한 러시아는 대체로 우리가 예상할 수 있었던 만큼,또는 그 이상으로 적극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걸음 나아가 러시아는 「공산주의의 퇴장」에 이어,『시장경제 체제와 진정한 민주제도를 갖추고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수호』 하겠다는 민주 세계의 보편적 가치를 선언하고,그 전체 밑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질서개편 과정에 강대국으로 남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다만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집단 추방된 우리 동포의 권리회복과 보상에 대해 옐친 대통령의 반응은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유감스럽다.
새로 실질적 관계를 맺은 새로운 이웃의 등장과 함께 한·러시아 두 나라의 관계발전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어떤 영향을 줄것인지 주목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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