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당시 우리나라 모습/사망자중 영아 40%… 평균수명 37세/혼인연령 19세 이하 여 81·남 44%/농가 4가구당 3가구가 소작농/실업률 조선인 5.4… 일인은 1%서울(당시 경성부) 인구는 불과 44만4천명. 처녀 10명 가운데 8명 이상이 19세가 못돼 결혼했다. 아기들이 숨지는 일이 잦아 연간 총사망자중 40%가 4세 이하 영아였다. 농가 4가구중 3가구는 소작농이면서도 쌀이 총수출액의 44%,대일 수출의 절반을 차지했다.
통계로 비춰진 1935년 당시 일제하 우리나라의 모습이다.
통계청은 지난 30년대 조선통계협회가 발간한 「조선통계시보」 11권을 입수,인구·산업·교육·고용 및 물가·무역 등 5개 분야의 통계자료를 분석해 18일 발표했다.
조선통계협회는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지난 35년 국세조사(현행 인구주택 총조사)를 처음 실시하면서 근대적 통계의 대중화를 위해 총독부 관방문서과 산하에 설치한 단체. 이 단체의 기관지인 조선통계시보에는 3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경제사회상을 담은 통계자료들이 수록돼 있다.
이번에 발표된 내용은 이중 일부를 통계청이 분석,정리한 것이다.
◇인구=35년 국세조사 때 우리나라 총인구는 2천2백89만8천명(일본인 61만9천명 포함)으로 90년 남북한 인구 6천5백24만명에 비해 3분의 1 수준. 시도별로는 당시 경북이 2백56만3천명으로 가장 인구가 많고 함경북도가 85만3천명으로 가장 적었다. 서울(경성부)시민은 44만4천명으로 90년 1천63만여명의 4% 수준에 그쳤으며 일본인이 서울 거주자의 30%를 차지했다.
35년 혼인 연령조사에 따르면 여자는 81%가 19세 이하에 결혼했고 15세미만 비율도 8.8%나 돼 조혼 풍습이 일반적. 남자도 19세 이하가 44%,17세미만이 11.6%에 달했다.
영양부족과 의술 미발달로 영아 사망이 많아 35년 당시 연간 전체 사망자 43만여명 가운데 4세이하가 41%인 17만6천여명에 달했다. 인구 1천명당 조사망률이 19.7명으로 90년의 5.8명에 비해 크게 높았다. 평균 수명은 31∼35년 평균으로 남자가 36.3세,여자 38.5세로 90년의 남자 66.9세,여자 75세와 비교할 때 절반을 겨우 웃도는 수준.
◇산업=35년 우리나라 농가호수는 3백1만가구로 전국 총가구의 75%였다. 영농형태는 순수 자작농은 18%에 불과했고 4가구중 3가구꼴인 75.9%가 소작농이었다.
공산품 생산액은 5억6천8백만원으로 농림어업 생산의 40%에 그칠 정도. 업종별로는 두부 등 식료품 공업이 29.8%,화학 26%,방직 14.5% 등의 순.
◇교육=전통교육기관인 서당이 30년대 들면서 신식교육에 급속히 밀리기 시작했다. 한일합방 초기인 12년 서당 학동수는 14만1천명으로 보통학교 학생보다는 3배이상 많았으나 25년엔 절반을 약간 웃도는 선으로 축소. 35년엔 전국 6천8백여개 서당에 15만3천여명이 공부한 반면 보통학교생수는 72만명에 달했다.
◇물가·고용·무역=38년 일제의 만주침략이 개시되자 전시체제 아래 물자부족 현상이 생기기 시작,38년의 전국 9개 도시 소매물가는 전년비 18.2%나 뛰었다. 특히 성냥값은 기준연도인 36년에 비해 무려 1백50%나 급등했고 목면이 89%,소금 66%씩 가격이 올랐다.
37년 총독부 내무국이 실시한 실업조사에 따르면 총실업자는 5만7천6백73명으로 이중 97%가 조선인. 실업률은 조선인이 5.4%,일본인이 1%로 발표돼 조선인 취업이 어려웠음을 반영했다.
35년 연간 대외교역액은 12억1천만원으로 이중 대일교역이 86%를 웃돌았다. 주요 수출품목은 쌀 비료 구리 콩 등으로 쌀은 총수출의 44%,대일 수출의 50%를 차지했다. 수입품목은 일본에서 직물 철강 기계류를,기타지역에서 밤을 많이 들여왔다.<유석기기자>유석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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