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의 「유」는 「돌아다님」이다. 그러니까 유세는 「돌아 다니며,설득함」이다. 그 고전적인 원형은 중국 전국시대의 세객 소진과 장의의 행적에서 찾을 수 있다.소진은 서방이 강국 진을 막기위해 중원의 열국이 연맹할 것을 주장했다. 이 계책(합종)으로 제후를 설득하여 여섯나라의 재상을 겸했다. 이에 대항하여 장의는 열국이 진과 연계할 것을 주장했다. 그 역시 그 계책(연형)으로 제후를 설득하여 열국을 움직였다. 둘이다 혀 끝 하나로 한시대를 주름잡는 것이다.
그러나,두 사람의 합종연형책으로도 전국시대의 난리를 수습할 수는 없었다. 진의 천하통일을 막지도 못했다. 두 사람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매우 박한것은 이 때문이다. 사마천은 「사기」의 소진·장의열전을,『요컨대 이 두사람은 참으로 위험한 인물이었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아무래도 유세의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물론 요즘의 유세는 전국시대의 유세와 다르다. 우리 대선후보들을 세객과 같은 반열에 놓을 수는 없다.
굳이 뜻 풀이를 하자면,요즘의 유세는 선거연설이요,선거운동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민주정치의 빼놓을 수 없는 수순이다.
그러나 유세가 「돌아 다님」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문제는 그 「돌아 다님」이 선거법과 시의에 합당하냐는 것 뿐이다.
이같은 「돌아 다님」의 뜻은 서양의 정치 전통에서 더 뚜렷하다.
영어로 양심·대지를 뜻하는 말 「앰비션(ambition)」의 뿌리는 라틴말의 「암비레(ambire)」라고 한다. 바로 「표를 얻기 위하여 돌아 다님」이다. 「돌아 다님」으로써 높은 자리를 차지하자는 것,그 자리의 권세로써 내 뜻을 펴자는 것인 「앰비션」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치일 수도 있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야심=정치=선거=「돌아 다님」의 도식이다. 요즘 우리 대선후보들이 사전탈법이라는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유세에 열중하는 까닭을 알 것도 같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끝난 지난번 미국대선에서,가장 많이 거명된 사람은 트루먼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2차 대전의 승전 대통령이다. 한때 그에 대한 지지율은 80%를 넘었으나 48년 대선무렵에는 지지율이 35%까지 떨어졌다. 냉전과 걸프전의 승전 대통령인 부시 후보와 처지가 똑같다.
그러나 트루먼은 대역전승을 거두었다. 그를 거명하며 그의 재판이기를 장담했던 부시 대통령은 끝내 쓴잔을 들었다.
트루먼의 기록한 대역전의 비결은 그의 「돌아다님」이었다. 모든 여론조사가 「트루먼 필패」를 점치고 있던 48년 7월,그는 보름 동안의 기차여행을 떠났다. 워싱턴에서 서해안에 이르는 철도변 곳곳에 전용열차를 세우며 73차례 연설을 했다. 9월초에는 다시 근 두달동안 기차여행을 강행했다. 대통령 업무도 기차안에서 보았다. 그는 2만2천마일에 걸친 2백75차례의 연설을 마치고,투표일 나흘전에야 워싱턴에 돌아왔다. 그가 대선의 모든 것을 「돌아 다님」에 걸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하여 트루먼은 강적 듀이를 2백만표 이상 이겼다. 부시가 트루먼을 거명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트루먼의 「돌아 다님」을 본뜬 것은 클린턴이었다. 유세버스를 마련하여 구석구석 누비고 다닌 것이다. 그 바람에 우리 대선후보들도 적잖은 돈을 들여 유세버스를 장만했다. 그는 선거운동 마지막날 28시간동안 8개 구를 순방하는 「돌아 다님」을 강행했다. 그리하여 그 역시 이겼다.
그러나 지난번 미국 대선은 결코 「돌아 다님」만의 선거는 아니었다. 어떤면에서 지난 선거는 모체선거,더 단적으로는 텔레비전 선거였다고 해서 지나침이 없다.
그 좋은 본보기가 무소속의 페로 후보다. 그의 「돌아 다님」은 겨우 13개주에 그쳤으나, 그는 텔레비전 광고와 텔리비전의 대담프로 출연,텔레비전 토론의 득점만으로,무소속 후보로는 80년만에 처음이라는 득표율을 올렸다. 또 선거기간중 텔리비전의 선거광고 매출이 3억달러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텔리비전 선거의 한 단면이다. 「돌아 다님」보다 전파의 영향력이 커진 것이다. 트루먼때의 기차 유세가 전설을 낳았다면,지금은 그 구실을 전파유세,영상유세가 대신한다는 얘기가 된다.
이처럼 세상이 달라지면 선거=「돌아 다님」의 양상도 달라지고,또 달라져야 한다. 되도록이면,그 「돌아 다님」을 전파에 싣는 것이다.
더구나 혹한속 대규모 유세의 어려움과 폐단을 우리는 87년 대선의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다. 그런 대규모 세몰이는 지역감정 대립,선거과열,과중한 선거비용의 원인이 된다. 자칫 폭력사태와 뜻아닌 혼란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지금도 우리의 교통사정은 그런 대규모 집회를 소화할 여력이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되도록 유세를 전파로 흡수하는 것 밖에 없다.
지금 한창 거론중인 텔리비전 토론은 꼭 성사시켜야 한다. 각 후보의 개별 대담프로도 있어야 한다. 각당 정책 브레인끼리의 대리토론도 가능할 것이다. 그것도 정책 항목별 자세한 토론을 시리즈로 엮는 것이 정책중심 선거에 보탬이 될 것이다.
또 유세장면의 보도도 군중보다는 후보의 연설내용에 중점을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숫제,카메라를 후보에게 고정시켜 놓고,연설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줄 수도 있다.
전파영상으로 대선후보의 「돌아 다님」을 대신하는 방도는 이것말고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일은 방송 전문가에 맡기면 된다.
이를 위하여 모처럼 공명선거를 앞세우고 있는 중립정부와 선관위의 할일은 따로 있다. 서둘러 각당과 협의하여 전파활동=대규모 유세자제의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다.<상임고문>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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