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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안토니오 코레아/김성우(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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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안토니오 코레아/김성우(문화칼럼)

입력
1992.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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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조상의 나라라고 믿고 있는 이탈리아 알비 마을의 안토니오 코레아씨와 코레아 성씨의 집성촌인 이 마을의 시장 주셉페 두란테씨가 지난주 서울에 왔다. 알바의 문화협회 회장인 코레아씨와 두란테 시장은 마을의 한 광장에 「코레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거기 「평화의 만남」이란 기념물을 세우는 등 한국과의 가교를 놓기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이다. 한국이 코레아씨들의 모국인지 아닌지는 아직 불분명한채로 이들은 오랜 소원이던 한국방문이 초청으로 이루어져 흥분하고 있었다.임진왜란때 일본 나카사키(장기)의 노예시장에서 이탈리아로 건너간 조선인 소년 안토니오 코레아는 그의 얼굴로 보여지는 2개의 그림이 나왔다.

MBC TV에 방영할 예정으로 안토니오 코레아 소년의 행적을 쫓고 있는 다큐멘타리 서울 프로덕션의 정수웅감독은 최근 이탈리아 현지 답사에서 그림을 복사한 사진 한장을 발견했다. 피렌체의 문화재관리국 사진자료실의 메디치 가문 기록철에서 나온 이 그림에 안토니오 코레아를 데리고 간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의 초상이 있었다. 전신상으로 선 그의 옆에는 두 젊은이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하나는 동양계요 하나는 흑인이다. 이 동양계 젊은이가 안토니오 코레아이기 쉽다. 그러나 단정을 할 수 없는 것은 카를레티는 당시 일본인 소년도 하나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흑인은 이때 역시 동행했던 모잠비크 소년이 틀림없겠다.

세계를 일주할만큼 대상인이던 카를레티는 당시 피렌체의 통치자이던 메디치 가문과 깊은 친교가 있었다. 안토니오 코레아의 기록이 나오는 그의 「여행기」는 메디치가의 당주이던 페르디난도 1세에게 헌정된 것이다.

다른 하나의 그림은 우리나라에도 이미 소개된 루벤스의 「한복입은 남자」란 소묘화다. 1983년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와 소묘화로는 최고가격인 32만4천파운드(3억8천만원)에 미국 캘리포니아의 폴케티 미술관에 팔렸고 그 그림사진이 국내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 그림속의 남자가 바로 안토니오 코레아일 것이라는 것이다.

플랑드르의 대화가 루벤스는 1600년 이탈리아에 갔고 1605년부터 1908년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안토니오 코레아가 피렌체에 도착한 것이 1606년이다. 카를레티의 기록에도 「안토니오 코레아는 지금 로마에 가 있다」고 되어 있고 메디치가와의 관계를 고려하면 로마에서 안토니오 코레아는 루벤스를 만났을 수 있다.

안토니오 코레아는 재치있는 소년이었다. 카를레티의 「여행기」에는 1602년 세인트 헬레나섬에 들렀다가 당시 스페인과 싸우던 화란군의 포로가 될 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화란군인들은 닥치는대로 귀중품들을 약탈했다. 게다가 그들은 칼빈교의 개신교도들이라 구교도들에 대한 적의가 살의에 가까웠다. 카를레티는 일본서 산 2개의 구리로 만든 그리스도상을 목에 걸고 있었다. 안토니오 코레아는 얼른 주인의 목걸이를 자기 목에 걸고는 바닷물 속에 뛰어들었다. 배의 선원들이 그를 건져 올렸다. 이렇게 똑똑한 안토니오 코레아였으므로 카를레티는 귀국후 그를 메디치가에 선물로 헌납했음직도 하다.

그렇다면 안토니오 코레아에 대한 기록상의 추적은 상당한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어떻게 해서 로마에서 이탈리아가 최남단인 알비까지 흘러갔는가가 가장 큰 의문이다.

코레아씨 시조가 그 안토니오 코레아냐 아니냐를 확인하기 위해 알비 마을의 코레아씨들이 오래전부터 희망해온 것이 선조들이 묻힌 옛 산타마리아 교회묘지의 발굴이다. 그 가능성을 현지 조사하기 위해 지난 5월 문화부에서는 장경호 문화재연구소장을 파견했다. 장 소장의 답사결과 보고로는 옛 교회묘지에 유골이 남아있더라도 그 수가 많아 골라내기가 어렵고 땅이 산성일 경우 오래된 유골은 부식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발굴결과가 기대에 어긋날 때는 코레아씨들의 꿈만 깨는 일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8천만원 이상이나 소요되는 비용의 위험부담이 크다는 말이다.

알비의 코레아씨들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확신을 확실한 증거로 확인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번에 내한한 두사람은 묘지발굴과 문헌적 고증을 위해 한국민이 지원해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코레아씨들이 스스로 한국인의 후예이고 싶어하는 그 지성이 가상하다. 순수한 피의 부름이다. 피는 논리가 아니라 직감이다. 그들은 꿈애 깨질 각오로 발굴에 집착한다. 파서 전혀 다른 뼈가 나오고 혹은 뒤섞여 못찾고 혹은 가루가 되어 버렸더라도 한은 풀린다. 메디치가의 기록을 차근히 뒤지면 무슨 단서가 나올는지도 모른다. 오직 비용의 문제다.

땅속에 완전히 묻힌 트로이의 유적지를 파낸 것은 어느 정부도 아닌 일개 상인이었다. 그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을 생각한다. 그는 어릴 때 읽은 호머의 서사시 「오딧세이」가 사실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발굴을 위해 돈을 모으기로 결심했고 거부가 되자 소아시아의 히살리크 언덕에 삽을 꽂았다. 트로이는 땅 밑에 있었다.

4백년전 처음으로 서양에 건너간 우리 소년 안토니오 코레아를 찾아내줄 어느 독지가는 없는가. 전세계에 산재한 코레아씨들의 뿌리를 캐내줄 어느 코리안은 없는가.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인의 표상으로라도 안토니오 코레아를 되살려내야 할 것이다.<본사 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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