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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자금 못내겠다는 재계(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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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자금 못내겠다는 재계(사설)

입력
1992.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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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자금과 관련된 유창순 전경련 회장의 발언은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족하다. 전경련 등 경제단체들이 앞으로 정치자금을 모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그동안 정치자금 부담에 시달려왔던 기업들의 솔직한 심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오히려 그새 쌓였던 정치권에 대한 재계의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지배적인 것 같다.표면상의 모금거부 이유는 현재와 같이 악화된 경제상황 아래서는 정치자금 모금이 기업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 되므로 그 규모를 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면에 깔린 진짜이유는 「정치자금을 내도 재계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다」 「일본보다 경제규모로 보아 더 과중한 정치자금을 내고도 재계의 영향력은 우리가 훨씬 뒤진다」는 등의 표현에서 읽을 수 있듯이 돈을 내고도 자신들의 목소리가 정계에 반영되지 않는데 대한 반발과 불만에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재계가 반발하고 있는 대기업 상호지보규제가 국회 경과위를 통과하는 등 정부와 정치권에 의한 재벌 규제정책이 강화되고 있는 것도 모금거부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으며,정치자금의 공식창구 곧 전경련이라는 등식 때문에 전경련이 입을 수 있는 정경유착 비난을 피해보겠다는 계산도 숨어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전경련의 이같은 공식창구 회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에서 선거자금의 상당부분이 대기업 주머니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부인되기 어렵다. 오히려 전경련의 모금거부로 말미암아 더 많은 정치자금이 비공개·음성화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볼 수도 있다.

음성화한 정치자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건전한 기업가 정신은 위축되고 정경유착을 유도하는 일부 기업인들의 뒷거래 활동이 성해질 소지가 커진다. 지난날의 이같은 정경유착이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의 천민화를 촉진시켜 왔다고 말해서 아무도 부인할 사람은 없을 줄로 안다.

유 회장의 발언에서 우리가 납득하기 어렵고 유감스럽게 느끼는 대목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재계가 마치 정치권의 푸대접 때문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한 대목이다. 비단 경제분야 뿐만 아니라 정치·문화·사회 모든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재계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세력이 따로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독재정권 아래서도 재계는 정치권력과 결탁해서 정도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보복이 두려워서였건,반대급부를 노린 것이었건,많은 대기업들이 음성적 정치자금을 자진 납부해왔던 지난날을 생각한다면 정치자금의 모금을 거부한 이번의 전경련 회장 발언은 격세지감을 주는 것이다.

재계의 정치자금 모금거부를 두고 우리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다만 정치자금은 공개되어야 하고,자금제공자가 그것을 이용,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는 없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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