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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는 없고 교훈은 남고(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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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는 없고 교훈은 남고(사설)

입력
1992.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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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이 지나갔다. 그 날은 「휴거 맹신자」들에겐 종말의 날이었다. 이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언제나처럼 새 아침이 밝았을 뿐이다. 시한부 종말론의 허구가 또 한번 드러났다. 휴거의 허상에 매달렸던 사람들은 깊은 좌절과 허망에 빠졌을 것이다.휴거라는 이름의 시한부 종말론이 돌출하듯 세력을 확대하면서 온갖 물의를 빚으며 세인의 관심을 모은 것이 사실이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차츰 신도가 늘면서 열병화하자 여기저기서 반사회적인 비정상의 증상이 터져 나왔다. 가정파탄에서 직장이탈,가산처분에서 군부대에까지 휴거열병이 번져갔다. 급기야 국내 시한부 종말론자의 우두머리격인 이장림목사는 종교인으론 부끄러운 죄목으로 구속까지 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죄상을 간단히 추려보면 휴거를 판 장사속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휴거의 날이 다가오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발뺌을 했다.

맹신자들에겐 운명의 날이라고나 할까,10월28일에 대비해 검찰과 경찰은 예상되는 불상사를 막으려 비상태세까지 갖췄다. 이 무슨 비극인가,아니면 희극이란 말인가. 왜 이런 왜곡된 현상이 이 사회에서 가능했고 또 기세를 올릴 수 있었는가,겸허한 성찰이 있어 마땅할줄 안다.

물론 정치와 사회의 불안정이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정의에 대한 불만도 빼놓을 수 없다. 변화의 욕구에 따른 대응도 미지근하다. 무언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데 그런 대상이나 신념이 없는 현실이다. 더럽고 못살 세상이라는 허무감이 여기서 비롯된다. 종말론이 뿌리내릴 토양이다. 그렇다고 이게 근본 원인일 수는 없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종교열병은 팽창하면서 신앙생활의 기본이 흔들린다. 올바른 신앙은 신학과 철학 등 합리적 학문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우리 종교는 도외시한다. 세속의 해학이 그대로 종교에 전염된다. 상업주의와 자기중심의 배타주의가 여과되지 않고 신앙세계에 침투하고 있음이 역연하다.

대교회와 대사찰이 계속 즐비하게 들어서고 있으나 사랑과 자비의 정신은 오히려 뒷전에 밀려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요란한 교회는 있으되 「가난한 마음」은 없는 형편이다. 종교의 본질은 고통을 참고 이겨냄이지 도피는 결코 아니다. 종말론의 주창자들은 이러한 도피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오늘의 혼돈을 재촉한 것이다.

만인이 만족할 지상낙원이 없는 한 종말론의 손짓은 언제나 있음직하다. 이 유혹을 뿌리칠 힘은 자기안정에서 찾아야 한다. 자신에 충실하면 종말을 두려워하거나 굳이 기다려야 할 까닭이 없다. 일상생활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이 곧 좁은문이며 고행의 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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