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지지 절대적 “아성실감”/주정꾼 아버지 밑에서 꿋꿋하게 성장/「미국인의 꿈」 성취 “경의”/만사 제쳐두고 도움줄 친구들 수두룩【리틀록(아칸소주)=정일화특파원】 20일의 TV토론에서 부시 대통령이 클린턴이 주지사로 있는 아칸소주를 비난한데 대해 아칸소주민들은 격분하고 있다.
21일자 현지신문 가제트지는 부시 발언에 대한 독자반응을 실었는데 거의가 『아칸소의 전체 생활을 봐야지 한두가지 숫자를 갖고 주전체를 비난하는데는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칸소주가 50개주중에서 최하위중의 최하위』라는 부시 대통령의 말이나 『아칸소주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으나 연방정부가 잘못 가고 있다』는 클린턴의 말에는 둘다 일리가 있다.
클린턴의 주장은 아칸소주가 가난한 주에서 출발해 지난 10여년간 경제,교육,환경,직업창출 등의 면에서 적게는 연 10%,많게는 28%까지 성장했기 때문에 올바른 성장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당 소득은 전국수준의 75%를 겨우 넘을 뿐이고 고등학교나 대학졸업률은 전국평균의 4∼7% 이상 뒤떨어져 있기 대문에 최하위주라는 부시의 주장도 틀리지 않은 셈이다.
부시 대통령의 아칸소 비난발언에 가장 강렬한 반발을 보이는 곳은 클린턴의 어릴적 고향인 하트 스프링스.
클린턴은 원래 텍사스쪽의 호프시에서 출생했으나 거기서 국민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의붓 아버지였던 로저 클린턴을 따라 하트 스프링스로 이사와 고등학교를 마쳤다.
리틀록서 남쪽으로 약 1백20㎞ 지점에 있는 하트 스프링스에는 클린턴의 밴드부 친구들,고등학교 여학생 동창,은사,이웃 아저씨 등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클린턴이 대학선택을 할 때 많은 상담을 했던 하트 스프링스고교 상담교사 에디스 아이언스(70),영어교사 로니 루벤,같은반 여학생 수잔 구드램,한해 위 여학생이자 이웃집 처녀였던 잰 마이어스,밴드부에서 같이 색스폰을 불렀던 2년아래 동창 보브 카빙튼 등은 지금 하트 스프링스의 「클린턴 우정모임」의 멤버들로 클린턴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나서는 사람들이다.
하트 스프링스는 온천지대이다. 지금은 46개 온천중 2개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클린턴이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전국적인 온천관광지여서 도박장,술집,호텔,여관,영화관이 온통 시가를 꽉 메우고 있었다. 연방정부는 지난 64년 이 곳을 연방 자연보호지역으로 규정해 옛날 집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 시중앙로인 파크 애비뉴를 따라 즐비하게 서있는 모텔,도박장,술집 건물을 보면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다.
클린턴이 살았던 의붓아버지 집은 파크 애비뉴 1011번지에 있다. 「페리 플라자 모텔」이라고 쓴 페인트칠이 벗겨진 간판이 붙어있는 모텔의 윗집인데 창문이 초록색으로 칠해진 제법 큰 2층 집이다.
클린턴은 술주정뱅이였던 의붓아버지 로저 클린턴과 마취사로 일하면서 여가만 있으면 경마장으로 달려가곤 했던 어머니 버지니아 켈리(67) 밑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집에서 걸어 20분쯤 되는 침례교회의 어린이 성가대에 소속돼 있으면서 방과후에는 늘 음악부에 남아 색스폰을 불었다.
밴드부 하급생이었던 현 중학교 음악교사 보브 카빙턴은 『빌이 불우한 가정생활중 체육부보다는 음악부에 들었던 것이 다행이 아니었던가 해요. 음악은 사람의 생각을 깊게 하고 미래와 과거를 늘 머리속에 그려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지요』라고 말했다.
클린턴은 고등학교를 2등으로 졸업했는데 몇몇 음악대학에서 장학금을 줄터이니 오라고 했으나 거절하고 워싱턴의 명문 조지 타운대에 들어갔다. 상담교사 아이언스는 『빌(클린턴)은 늘 공민선생 메리 마르티를 존경한다고 말했는데 마르티 선생(사망)의 영향을 받아 국제정치학을 택한게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클린턴의 생모 켈리여사는 하트 스프링스에서 거의 일생을 보낸 전직 마취사로 현지에서는 유명한 여걸이었다.
그녀는 첫 남편 월리엄 블라이드씨가 클린턴을 낳기 두달전 자동차사고로 죽자 뉴올리언스로 옮겨 마취사자격을 땄다.
두번째 남편은 로저 클린턴. 알코올중독이 심해 그녀에게 총질까지 한적이 있어 이혼했다가 다시 결합했으나 그도 암으로 죽었다.
세번째 남편 제프리 드와이어도 10년쯤의 결혼생활 끝에 사별했다. 1983년에 지금의 남편인 식료품도매상 켈리를 만나 하트 스프링스 교외의 해밀턴으로 이사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의붓아버지 집에 살면서 환락의 거리를 오가던 클린턴의 성장과정은 경의롭기까지 했다. 어머니 버지니아 켈리는 『클린턴은 어릴 때부터 속에 영감님이 들어 앉은 것 같은 아이였다』고 회고했다. 불우한 시절을 이긴후 명문대학을 거쳐 고향의 주지사로 12년을 지내다가 결국 연방대통령에까지 도전한 클린턴의 모습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바닥에서 꼭대기를 정복해가는 「미국인의 꿈」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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