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위주서 사회활동 “맹렬대시”/억척·강인함 바탕 각 분야서 기반 구축/「연변남대문」 연길서시장 “여성 상권장악”/중국 개혁·개방회오리에 힘… 정계진출까지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에서 택시를 잡다보면 여자운전사를 많이 볼 수 있다. 좀 거친 평양말투지만 친근하게 『어디 갑네까』하고 물어온다. 3년전 첫 아이를 낳으면서 공안국직장을 그만두고 택시영업에 뛰어든 주부운전사 남영화씨(28)는 『여자들은 대개 낮에만 일하고 저녁에는 가정일을 돌볼 수 있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러워 좋다. 월수입도 전 직장은 2백원이었는데 5백원(7만5천원정도)이나 된다』며 『앞으로 돈 많이 벌어 내차로 운전하는게 꿈』이라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당연시되고 보편화돼 있다. 음식점에서 남녀가 함께 술을 마시며 노래 부르는 모습이 흔하며 주부가 무도청에서 외간남자와 춤을 추는 것도 흉이 아니다.
백화점이나 호텔의 복무원은 거의가 여성이며 지역에 따라서는 소학교 교원의 95%이상이 여성이어서 우리나라처럼 교직의 여성화문제가 대두될 정도이다.
연변 TV방송국은 직원의 3분의 1 이상이 여성이며 중국 유일의 통신사인 신화통신에서도 총인원의 30%가 넘는 여기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안전국·검찰·법원 등도 10% 정도가 여성이다.
그러나 여성택시운전사는 연길만의 독특한 현상이며 중국의 수도인 북경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이 점 하나만 보더라도 타민족보다 억척스럽고 강인한 조선족 여성들의 생활태도를 알 수 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정권이 성립될 당시 전국의 산업여성노동자(공장근로자) 수는 60만명에 불과했으나 90년말에는 5천1백37만명으로 총 노동자중 37.4%에 이르렀다. 89년말 현재 농촌에 있는 향진기업의 경우는 이보다 더 높은 42%이다.
종사분야도 계속 다양해져 공업,상업,음식업 등에선 거의 절반을 차지했고 문학 연예 국방 등에서도 활약이 두드러진다.
중국의 장구한 역사로 볼때 여성의 사회참여는 일천하다. 여성의 사회진출은 중국공산당에 의한 「중국대륙의 해방」이 분기점이 됐다. 모택동은 일찍이 『여성이 이 세계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다』며 여성의 사회적 평등을 주장,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나와 사회주의 건설에 동참할 것을 역설했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진출이 본격화된 것은 78년 공산당 11기 3차 전원회의부터다. 등소평은 이 회의에서 『철밥통(국가공무원 평생직장제)을 부숴버리고 계약제를 실시하며 공개채용을 원칙으로 할 것』을 제안했다. 개혁개방은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자격으로 경쟁에 참여하고 다양한 취업영역을 확보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92년 8월말 현재 연변자치주 65만명의 기업체 종사자중 여성근로자는 27만명으로 41.5%. 또 자치주의 교육,서비스 및 위생분야 종사자로 사업(일)하는 여성은 2만2천명으로 전체의 46%이다.
여성과학기술자는 전체의 41.2%인 1만9천6백여명이며 개혁개방 바람을 타고 급증한 개체호(자영업자)에서는 2만8천3백여명으로 전체의 60%나 된다.
연변의 조선족 여성들은 능력이 출중하거나 타의 귀감이 되는 「여노력모범」 「5·1 메달」 「3·8 붉은기수」 「3·8 녹색메달」 「전국우수부녀자」 간부만해도 56명이나 배출했다.
조선족 여성들은 북경,상해 심지어 개방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는 먼 남부 광동성에까지 가서 국내외 물자를 구입해옴으로써 자치주 8개 시·현의 상품교류를 촉진하고 있다.
「연길의 남대문시장」인 연길서시장만해도 상인의 80% 이상이 조선족 여성들로 연간 1천2백만원이라는 막대한 세금을 내고있다.
길림성도인 길림에서 남편과 함께 미용실 「특사미발청」을 꾸리고 있는 변영순씨(26)는 『연변의 산골마을에서 처음 올라왔을때는 막막했다』며 『아침 8시반부터 저녁 10시까지 연다. 지금은 단골손님들이 많아 수익도 만만찮다』고 말했다. 시골출신으로 초중학교밖에 안나온 변씨는 독학으로 공부해 특사미발강습소까지 개설했는데 변씨가 지은 교재는 길림성 미발강습소 평가에서도 제일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도문시의 성해음악커피청은 시내에서 손꼽히는 사영기업. 88년 문을 연 이 커피청은 독립국가연합 일본 등에서 오는 손님과 두만강을 구경하러 오는 한국관광객들로 붐빈다. 총경리(사장) 한해순씨(58)는 최근 훈춘에도 성해커피청과 무역상점,복장가공공장,전자유희실(전자오락실) 등을 신설했는데 장사가 잘되고 있다는 소문이다.
연길시 성월 민속옷공장의 여사장인 최월옥씨(55)는 한복을 입는 조선족 여성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최씨는 연길서시장에 229매대(독대),405매대 등 3개의 매대(점포)를 갖고 있는데 올해부터는 성월민속옷장을 꾸려 전문한복을 직접 만들어내고 있다.
최씨가 내는 세금만도 매달 1천9백원이 넘는다. 전국부녀연합회 진모화주석도 최씨가 손수 지은 한복을 입고 있는 등 중앙이나 성에서 온 부련회 간부들은 대개가 최씨가 지은 한복 한벌씩을 갖고 있다고 한다.
연변여성운동의 시발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으나 일제 침탈기 조선족 여성들 속에서 일기 시작한 여성들의 야학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신민주주의 혁명운동시기(중국공산당 수립전) 야학에서 문맹에서 벗어나 계몽받은(개화된) 조선족 여성들은 항일전쟁과 중국 해방전쟁에서 역사에 길이 빛날 공훈을 세웠다. 일제와 싸우다 희생된 조선족 여성열사는 3백96명으로 길림성 여성열사의 95%나 된다.
연변여성의 정치적 지위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시나 현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부서기,부현장,공장,광산,기업,사업단위의 여안부는 총 2만5천9백48명으로 자치주 총간부의 33.9%를 차지하고 있다.
직장여성들은 또 부녀절인 3월8일 하루 동안은 일터에서 해방돼 집에서 쉬며 남성들로부터 선물을 받곤 한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진출엔 어느 나라에서나 보이지 않는 성차별이라는 엄연한 현실의 두꺼운 벽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선 개혁개방과 함께 생산성·효율성을 중시하는 서구 자본주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삼자(외국자본의 단독투자·합자·합영) 기업에서는 모집과정부터 여성 합격선을 높게 하는 등 여성채용 기피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여대졸업자의 고학력 실업사태가 예견되는 상황이다.
10월1일 발효되는 여성권익보장법도 여성들이 남성들과 평등하게 노동권리를 향수(향유)하도록 제정됐으나 얼마나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년도 남자보다 5년 빠른 50세로 규정돼 있다. 올해 52세라는 한 조선족 퇴직여성은 『여기에선 50세만 넘어도 여자들이 노인취급 받는다. 한국부인네들처럼 처음부터 직장에 안다녔으면 몰라도 갑작스런 퇴직으로 노인취급 받으니 서럽다. 요즘은 들놀이로 소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족 여성들은 대체로 한족여성들보다 남녀평등문제에서 갈등이 심하다. 장춘의 장백산 빈관복무원 황수옥양(21)은 중국 조선족의 대표적 단점으로 대남자주의(남성 중심주의)를 지적하며 조선족 남성들을 못마땅해 했다.
반면 용정의 농민 최순애씨(31)는 여성의 남성순종이 조선족의 장점이라고 주장했으며 연길의 호텔복무원 권향란양(21)은 『과거엔 여성들이 순종했으나 요즘은 모든 점에서 동등을 요구한다』고 꼬집었다.
조선족 여성들은 또 여성들이 주로 가정생활만 하는 한국보다 남녀평등이 실현됐다고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내세우면서도 한국여성들의 여유있는 모습이나 안온한 가정울타리안의 생활을 부러워하는 모순을 자주 보여주었다. 그것은 여성의 사회참여가 여성해방의 일환이라는 화려한 구호속에 출발했지만 실제로는 중국같은 저개발국에서 남자 혼자 벌어서는 가정을 꾸려나갈 수 없다는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여성들에게 시련이자 도전이다. 개혁개방의 성과에 따라 조선족 여성들의 의식과 생활은 더욱 급변해 갈것이다.
□특별취재반
▲사회부:임철순차장 강진순기자
▲국제부:조상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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