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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가까워진 2백만 동포의 어제와 오늘(중국 조선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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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가까워진 2백만 동포의 어제와 오늘(중국 조선족:1)

입력
1992.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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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신둔마을/불모지개간 반세기 “황금 땅으로”/일제 「대륙침략 술수」 모르고 집단이주/주먹밥 끼니로 농사·약재재배 부축적/결혼은 주민끼리 “이웃이 사돈”… 명절땐 막걸리 파티도연길에서 서북쪽으로 1백20㎞. 포장·비포장도로를 2시간30분 가량 차로 달리면 안도현 소재지인 명월진이 나오고 여기서 북동쪽으로 20㎞를 더 가면 조선족이 모여 사는 해발 5백m의 중국 길림성 안도현 장흥향 신둔촌에 닿는다. 일제의 간악한 식민지 정책으로 수탈당하며 신음했던 우리 농민들의 아픔과 단절,그리고 최근의 한중 수교로 들뜬 겨레의 마음을 그대로 증거해주는 곳이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본격적인 중국대륙 침략을 위한 교두보로 만주개발을 꾀했고 황무지였던 이곳에 우리 농민들을 집단이주시켰다. 땅과 집을 주고 소도 준다는 감언이설로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우리 농민들을 속였다.

신둔촌의 주민은 현재 76호 3백여명. 1938년 3월18일 경남 합천군의 농민 40호가 면사무소 앞마당에 모였다. 대구로 가기위해 버스를 탔던 그날은 봄인데도 억수같이 비가 내렸고 떠나는 사람 보내는 사람 모두가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다.

이들이 대구에 도착했을 때 밀양의 20호가 합류했다. 모두 60호 3백21명의 남부여대한 거지꼴 농민들이 3월19일 기차에 올라 도문을 거쳐 명월진에 도착한 것은 3월24일 밤. 하루 세끼 주먹밥을 먹으며 허기를 때워온 이들은 역근처 집에서 하룻밤을 잔뒤 지친 몸을 이끌고 3월25일 하루종일 걸어 지금의 신둔촌에서 1.5㎞ 북쪽의 골짜기에 초라한 짐을 부렸다.

왜놈들이 선전과는 달리 키를 넘는 억새풀,돌무지뿐인 황무지였다.

○“소·집 주겠다” 속여

그때부터 혹독한 고생이 시작됐다. 당시 안도현 일대는 연변지구에서 가장 개발이 더딘 낙후지였고 현전체의 인구가 2만명이 되지 않을 만큼 땅은 넓고 사람은 적은 곳이었다.

비가 적고 수질도 나뿐 이곳에서는 공산당의 활동이 거셌는데 일제는 황무지 개발과 공산당 색출을 위해 철저하게 우리 농민들을 이용했다. 안도 일대에는 1945년 일제 패망때까지 1천3백여호의 우리 농민들이 집단이주했다.

신둔촌의 농민들은 땅을 갖게 됐다는 기쁨 하나로 혹독한 고생을 견뎠다. 일제는 이들에게 쌀과 농기구 옷감을 빌려주고 장부에 적은 뒤 정착 3년후 어느 정도 수확이 있게 되자 이자를 붙여 회수하기 시작했다. 일제가 패망하여 중국 땅에서 물러가지 않았더라도 농민들은 다시 소작인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1945년 일제의 항복후 일부는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남은 사람들은 1958년에 골짜기에서 넓은 공터로 내려와 집을 짓고 새로 개척했다는 의미에서 신둔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마을에는 한족이 전혀 들여올 수 없다. 경상도 사람들만 모여 사는 마을은 연변 최고수준을 자랑할 만큼 농악으로 유명해 안도현은 이곳을 문명촌,민속촌으로 지정,한족의 유입을 막고 있다. 지난해에 두 집이 슬그머니 들어와 사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내쫓은 일도 있다.

신둔촌은 주위에서 알아주는 부촌이다. 지난해의 1인당 소득이 인민폐 1천5백원(한화 22만5천원 상당)으로 1천∼1천3백원이 대부분인 한족마을을 압도하고 있다. 그래서 한족은 자꾸만 이 마을에 끼여 들어와 살고 싶어 한다.

촌장 권유세씨(55)에 의하면 마을에는 전화를 갖춘 집이 하나 있고 흑백TV는 어느 집에나 다 있다. 20%정도는 채색 TV를 갖고 있다.

또 마을 전체에 트랙터가 7대,소가 1백마리가 된다. 주민들은 농사를 짓는 것외에 약재(주로 인삼)재배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농지보유 면적은 가구당 평균 논 한쌍(1㏊),밭 한쌍규모이다.

옛 초가는 73년부터 허물고 벽돌로 개조,농가마을 같아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주택개량 사업도 연변의 농촌에서 가장 먼저 시작했다고 한다.

이제 이민 1세대는 모두가 세상을 떴다. 3∼4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40대가 가장 많다. 최고령자는 80세 할머니이다.

합천·밀양 사람들만 모여 사는 곳의 생활방식은 완전 경상도식이다. 마을사람들끼리 혼인을 하다보니 마을 전체가 사돈인 상태이다.

그러나 개혁 개방바람이 불면서 최근엔 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가는 사람이 이 마을에도 늘어나고 있다. 10여호가 식당 상점을 경영하거나 운수업을 하며 도시에 나가 산다.

이 마을의 대졸자는 길림공학원 연변대 연변농학원 출신 등 12명이나 이들 모두 도회지에서 살고 있다.

○현 3백여명 살아

학교는 1.5㎞ 거리에 한족과 같이 다니는 오봉소학교가 있고 10㎞ 떨어진 장흥향에 중학교,20㎞ 거리인 현에 고등중학교(우리의 고교)가 있다. 주민들중 나이가든 사람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다. 교육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을뿐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린이까지 모두 일에 매달려야하는 상황에서 학교에 다니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을 노인회장 이상준씨(61)의 고향은 경남 합천군 쌍백면 하신리. 7세때 누나와 함께 부모에 이끌려 이곳에 온 이씨는 광복전 오봉소학교를 2개월 남짓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이다. 이씨의 아버지는 47년 불과 40세로 병사했고 지금 그의 가족은 결혼한 아들 4형제와 손자들,80노모,부인으로 4대 가정을 이루고 있다.

이씨는 지난 90년 한국을 다녀왔다. 삼촌 세분과 사촌 17명을 두루 만나 흘릴 수 있는 눈물은 모두 흘렸다고 한다. 이씨의 어머니도 지난해에 혼자 합천에 다녀왔다.

이씨는 배고픔과 가난,날마다 저물도록 뼈가 빠지게 일해야 했던 어린 시절을 되새기며 『이제 나는 부러운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마을에서 한국에 다녀온 사람은 86년부터 30여명에 이른다. 합천군 초계면 유하리 태생인 정현주씨(77)도 89년에 고향에 다녀왔다. 정씨도 51년만에 23세때 떠난 교향의 놀랍도록 달라진 모습을 눈에 새겨 넣듯 골고루 돌아보고 3형제중 중국에 와서 풍토병으로 죽은 막내동생 이야기를 하며 울었다고 한다.

역시 합천사람인 이춘수씨(62)는 선친이 남긴 일기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부모,두 누나와 함께 5명이 중국에 온 이씨는 그뒤 남동생 둘을 더 보게 됐고 동기간의 우애가 어느 집보다 더 두텁다고 자랑하고 있다.

이씨는 힘들고 어려운 일에 부닥칠 때마다 선친이 꼼꼼히 기록한 일기를 꺼내보면서 망향의 정과 괴로움을 달랬다고 말하고 있다.

마을 할아버지중 가장 어른인 김동수씨(79)는 양산 출신. 소화 5년인 1930년 17세때 중국에 와 산에서 등뼈가 휘도록 일하며 살다가 신둔촌 사람들과 합류하게 됐다. 김씨의 회고에 의하면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6·25때와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다. 이 마을에서도 6·25때 10여명이 중공군으로 참전을 했고 그중 몇명이 전사했다.

조국에 총부리를 들이댄 일이었지만 당시 농민들에게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고 공산당이 하는 말 그대로 한국을 해방시키는 성스러운 전쟁으로만 믿었었다. 당시 중공인민해방군으로 참전했던 10만명의 조선족은 거의가 그렇게 믿었다고 한다.

그뒤 1966년부터 시작된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으로 이 마을에도 회오리가 몰아닥쳐 농민들의 유일한 한풀이수단이었던 농악이 10여년간 중단됐다. 마을의 상여집까지 『잡귀신이 붙었다』고 불질러버리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숨을 죽이고 살 수 밖에 없었다.

농악은 79년부터야 부활됐다. 주민들은 각종 행사때마다 연변TV에 단골로 출연,신명을 내고 있다.

○한·중 수교에 희색

신둔촌은 막걸리로 유명하다. 다른 조선족마을에서는 막걸리가 고량주에 밀려 거의 사라졌으나 이곳에서는 그 맛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설날·추석·노인절(8월15일) 9·3절(연변 조선족자치주 창립일)외에 이 마을에선 건둔기념일을 쇤다. 이곳에 첫발을 디딘 3월25일이 되면 농민들은 소를 잡고 막걸리와 청주를 빚어 다른 곳의 손님까지 초청,한바탕 농악무와 탈춤행사를 벌이며 망향의 마음을 달랜다.

북쪽으로 우뚝 솟은 칠성바위산(해발 8백m)은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진산이다. 주민들은 산이름도 고향식으로 바꾸어 부르며 의지할 곳 없는 삶의 기둥으로 삼아왔다.

이제 중국과 한국의 국교가 트이고 조국은 더욱 가까워진 셈이 됐지만 신둔촌 사람들이 중국에 내린 뿌리는 깊어 무작정 고향에 돌아가 살려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일가 6명이 중국에 왔던 경현옥씨(66)는 지금도 비가 내리는 날이면 혼자 술을 마시며 흥타령조로 『빨리 나를 데려가오』하고 노래를 부르며 산다.

◎중국이주 약사/19C 중엽부터 간도등에 본격 이동/한족지주·일군 박해속 새삶터 일궈

조선인이 중국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까지로 소급된다. 청은 현재의 국경선 부근 간도지방에 들어와 농사를 짓는 조선인이 많아지자 1677년 봉금령을 내려 아무도 이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이래 조선인이 중국유입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1860년대부터 두만강을 건너가 불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1870년엔 압록강 연안에 조선족 마을이 28군데나 됐으며 1881년 봉금령 철폐후에는 이주자가 더욱 증가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간도지방뿐만 아니라 만주전역에 이주하게 된 것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이다. 이를 제2차 이주라고 부르는데 대부분이 일제의 잔혹한 경제수탈을 피해 살 길을 찾아나선 농민들이었다. 1916년 연변의 총인구 26만4천9백82명중 조선인이 75.9%인 20여만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연변에는 접경지대인 함경도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만주에 이주한 조선족은 수도작에 성공,끈기와 지혜를 과시하며 만주 개척에 큰 공헌을 했다. 연변에서도 1910년대에 벼농사가 시작됐다.

일제는 벼농사의 성공을 보자 1907년의 일로조약과 1909년의 간도협약을 바탕으로 자국민(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아래 1910년 연변에 영사관과 간도파출소를 설치,침략기도를 노골화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일본인과 조선인의 이주를 계획적으로 추진,땅이 없는 사람이 만주에 가서 2년 동안 일을 하면 땅을 주어 자립토록 해주겠다며 집단이주를 독려했다. 이에따라 1860년대 1910년대 이주에 이어 제3의 이주가 시작됐다. 1881년 연변의 조선족 인구는 약 1만. 1910년엔 10만9천5백명으로 늘었고 1910∼1931년 20년간 29만명이 더 증가했으며 1944년엔 63만9천6백49명으로 조사됐다.

만주등지로 이주한 조선족은 만족지주들의 고리대와 높은 소작료,중국국적 취득종용 등의 박해와 동양 척식회사(만주)의 경제적 수탈,1937년 중일전쟁과 함께 가속된 일인화교육 등으로 숱한 고난과 설움을 겪어야 했다.

□특별취재반

▲사회부:임철순차장 강진순기자

▲국제부:조상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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