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참 묘하다.56년전과 오늘,36년의 베를린과 92년의 바르셀로나,손기정선수와 황영조선수를 대비해 볼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36년 손 선수의 마라톤 제패는 8월9일,일요일이었다. 이번 황 선수의 쾌거도 8월9일,역시 일요일이다. 36년과 92년은 한해 3백65일의 요일이 모두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기록은,36년과 92년이 같은 요일(수요일)에 시작되고 또 같은 윤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28년만에 한번 돌아오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36년과 모든 요일이 일치하는 첫 해는 64년이 된다. 바로 동경올림픽이 열린 해다. 그 다음이 올 92년,다시 다음은 2020년.
아무래도 베를린에서 시작된 암울한 드라마는 28년 또는 56년만의 반전을 처음부터 예정해 놓았던 것만같다. 우리는 그 첫번 「천시」를 놓쳤고,두번째 「천시」를 잡은 것이 아닐까. 손옹이 적중시킨 바르셀로나 마라톤 금메달의 예감도 단순한 우합같지가 않다.
그러면 이 「천시」의 뜻은 무엇일까.
80노구를 이끌고 바르셀로나 현지로 달려간 손옹은 『오늘에야 내 국적을 찾았다』고 했다. 금메달 시상대의 황 선수는 『오늘의 우승은 7천만 겨레의 승리』라고 화답했다. 그처럼,우리 7천만이 함께 이겼고,7천만 모두의 국적을 찾았다. 이제사 우리는 베를린의 설움을 역사의 교훈으로 치부할 수가 있다. 치욕감에 시달림이 없이도 그 사실을 사실로서 기억할수가 있다. 황 선수와 끝까지 겨루었던 일본 선수의 기량을 구김없이 칭찬 할 수가 있다. 다시 한번 손옹의 말을 빌리면 『이제는 여한이 없다』
그의 말대로,바르셀로나의 반전드라마는 절묘하고 완벽한 한풀이 한마다이다. 그래서 매우 상징적이다. 하지만 한풀이는 단순한 카타르시스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로부터의 해방」을 의마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상이 달라졌음과 우리의 자리와 구실이 달라짐을 깨닫는다. 그것은 「육상중흥」에 그치지 않는,인식전환의 문제를 우리 앞에 제기한다.
그만큼 바르셀로나는 많은 것을 상징한다. 그중에서도 먼저 꼽을 것은,56년만의 반전이 아무도 시비 못할 실력으로 이루어졌음이다. 그 바탕이 「차라리 죽고 싶었다」는 맹훈련이 있었음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70년 제25주년 광복절,베를린에 일었던 작은 파문을 기억한다. 어떤 국회의원이 올림픽 기념탑을 쪼아,손 선수의 일본국적 표시를 한국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기념탑의 손 선수 국적은 지금도 일본으로 남아있다. 하지만,지금 같아서는 그 기념탑을 그냥 둔들 어떠랴 싶어진다. 반전이 있는 지금,그 기념탑은 일본의 치욕으로 될뿐이다. 애시당초 그것은 인류애의 올림픽이상을 짓밟은 나치스적 표상에 불과하다.
그러니 「야밤의 징질」 따위는 더 생각할 것이 없다. 우리의 국적 찾기는 노력과 실력으로만 가능하다. 바르셀로나 감격의 여운 속에 맞는,제47회 광복절 아침의 상념도 이 한마디로 그친다.
그래서,요즘 한·일간의 현안을 보는 마음은 더욱 착잡하다.
광복 47년을 지나며,많은 사람이,이제는 한·일 관계가 달라져야함을 말한다. 어디서나 입을 열면 선린우호요,상호보완이다. 말아야 고상하지만,선린우호,상호보완은 대등한 관계와 경쟁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바로 이웃나라끼리의 숙명이다.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이라도 이 엄연한 숙명을 가려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 미사여구 뒤의 실상은 어떤가. 지금의 한국과 일본은 과연 대등한가. 감정을 떠나서 일본과 경쟁할 의욕이 우리에게 있는가. 우리는 그 경쟁을 조금씩이라도 따라잡아가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대담이 부정적인 동안,우리의 광복절은 자성의 날이어야 한다. 달리 자기하는 바 있어야 옳다.
그리하여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떳떳해야 한다. 욕을 하며 손을 내미는 것같은 꼴은 다시 없어야 한다. 요즘 현안인 대일배상 문제에서 이런 생각이 더욱 절실하다. 정신대건,원폭피해자건,우선은 우리가 동포애로서 끌어안고 원호해야 한다. 대일배상청구는 그 다음의 사안으로 쳐도 늦지 않다. 그같은 고지에 서서야,우리는 일본이 달라질 것을 제대로 촉구할 수가 있다.
거듭 말하지만 선린우호·상호보완은 대등한 관계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 대등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지만,일본도,대등한 이웃을 두어야 스스로 편안할 수 있음을 깨닫는 날이 멀지않을 것이 틀림없다. 그제서야 한·일 관계는 달라질 수가 있다. 「과거로부터의 해방」을 이룰수가 있다.
그런 날은 물론 빨리 올수록 좋다. 생각같아서는,광복 50주년에는 새날을 보고 싶다. 그러나 앞의 「요일천시설」은 45년과 한해 내내 요일이 같은 「기록의 해」를 2001년으로 점지해 놓고 있다. 8·15로부터 56년,바로 21세기가 시작되는 해다.
이것은 너무 비관적인 전망일까,아니면 너무 낙관적인 전망일까.<상임고문>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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