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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팩 버리는 법/김창열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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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팩 버리는 법/김창열칼럼(토요세평)

입력
1992.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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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서 우유팩 하나를 꺼내든다. 2백㎖들이,한 면이 7.5×6㎝쯤의 종이팩이다.그런데 이 좁은 면에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 찍혀 있다. 제품명 영업·제품허가번호,원료와 함량,살균방법,주문방법,반품 및 교환장소,보존온도 등등. 더하여 이 우유가 천연식품이라는 선전문,「당제품은 경제기획원 소비자 피해보상 규정에 의거,교환 또는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알림.

이 종이팩의 잔 글씨를 애써 읽어서 알고 싶었던 사항은 그중 다음의 두 줄이다.

「포장재질=종이+에칠렌수지」

「빈 팩은 접어서 처리합시다」

그러나 궁금증은 여전하다. 「종이+에칠렌수지」란 표시는 이 종이팩 안쪽을 비닐로 코팅했다는 뜻일텐데,그렇다면 쓰레기 분리수거에서 이 팩을 종이로 쳐야 하나 비닐로 쳐야 하나. 또 「빈 팩을 접어서 처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래서 다른 팩을 꺼내 본다. 2백㎖들이 사과주스팩이다. 이 팩에는 포장재질이 선전문구처럼 찍혀 있다. 외국의 무슨 무슨 설비에 의한 「6겹의 특수 은박지 포장. 내면은 폴리에틸렌수지」라는 것이다. 그것이 왜 자랑거리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한 가지 의문이 더해진다. 「특수 은박지」란 또 무엇일까. 분리수거를 하자면 어느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까.

이 푸념같은 불평은 이런 뜻이다. 상품마다 깨알같은 글씨로 만드는 법,보관하는 법,먹는 법,피해 보상받는 법까지 다 찍어 놓으면서,버리는 법은 왜 표시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잘 알려진대로,종이팩은 양질의 펄프를 쓰기 때문에 재활용 가치가 매우 높다. 우리나라에서 소비하는 종이팩 하루 4백만개를 전량 재생하면,66만통의 화장지를 얻을 수가 있다. 이들을 그냥 태워버린다면 그 결과는 매일 20∼30년생의 나무 2천7백그루를 태워버리는 꼴이나 같다.

그래서 종이팩 재활용은 쓰레기 자원화의 한 과제로 된다. 당연히 종이팩을 수거·재생할 체계를 시급히 마련해야 하지만,그 전제는 종이팩의 분리수거·수집이 잘되게 하는 방도다. 그중 하나가 이미 시행중인 예치금제도요,그보다 더 요긴할 것이 종이팩 「버리는 법」의 계몽이다. 종이팩마다 「버리는 법」을 표시하는 것이다. 종이팩의 재활용이 가능한지,소각 또는 매립해야 할 쓰레기인지,종이팩만을 따로 수거할지 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지금 당장은 종이팩의 재활용이 안되고 있더라도 이런 표시가 적어도 분리수거에 도움될 것만은 틀림이 없다.

이 이치는 결코 팩에만 국한될 일이 아니다. 쓰레기를 발생시키는 모든 상품에 「버리는 법」을 표시케 함으로써 환경대책에 획기적인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폐식용유가 수질오염의 한 원인이 되며 그 대책의 하나가 기름을 종이에 묻혀 버리는 것이라면,그 뜻을 기름병에 표시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 폐식용유로 비누 만드는 법을 곁들인다면 그 기름회사의 녹색이미지도 높아질 것이다.

대기오염과 수은중독의 원인이 되는 수은전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지에 수은이 들었다는 표시와 함께,수은은 소각·매립이 다 불가하므로,다 쓰고 난 전지는 별도 회수한다는 사실,수거에 따른 보상이 있으면 그 내용을 표시케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상품마다 상품특성에 따라 「버리는 법」을 표시하는 것은,환경대책과 대소비자 봉사 양면의 의미를 지닌다. 다만 그 표시가 너무 다양해서 복잡하다면,그중 공통된 몇가지는 도안화해서 표시할 수가 있다. 그 마크의 색깔을 대별해서,분리수거 쓰레기통의 색깔(예=재활용 쓰레기는 노란통)과 일치하게 하는 것도 생각함직한 방안이다.

좀 새삼스럽지만 우리 소비자는 「알 권리」를 법으로 보장받고 있다(소비자보호법 제2조). 앞에서 본 우유팩의 잔 글씨는 이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버리는 법」은 들어 있지 않다. 왜 그럴까.

그 종이팩의 잔 글씨는 공산품 품질관리법,공업표준화법,식품위생법 등 숱하게 많은 법률의 요구를 담고 있다. 동시에 그런 글씨들은 규격화를 통하여 제품의 품질과 성능과 안정성을 확보하며,대량생산을 가능케 하는 우리 경제·사회체제의 일면을 반영한다. 그런 만큼 규격화가 아니면 지금의 우리 경제와 생활이 성립될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칠 것은 없다.

그런데 종이팩을 읽어 보면,그 규격화는 생산­유통­소비에 그치고,그 다음 폐기단계에는 미치지 않고 있다. 종이팩에 「버리는 법」이 없는 까닭이 이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우리 몸의 동맥만 돌보고 정맥은 버려두는 섭생법이나 같다. 우리가 사는 집으로 치면 부엌은 정비하면서,변소는 정비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쓰레기 전쟁의 원인이 바로 여기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이제는 생산­유통­소비단계의 규격화만이 아니라,폐기의 규격화도 생각하는 것이 옳다. 제품의 효용만이 아니라,그 제품의 해악도 생각해야 한다. 상품마다 「버리는 법」을 표시해야 한다는 것은 이 뜻이다.

그 표시의 의무는 마땅히 생산자에게 지워져야 한다. 외국에 그런 예가 없다면 우리가 앞장서야 한다.

마침 어제(5일)가 제20회 세계환경의 날이라서,우리나라 환경단체들은 이 날을 「쓰레기 없는 날」로 선포했다. 「쓰레기 없는 날」이란 표방의 과장법에 애교가 있고,이를 위한 다섯가지 운동방안도 다 훌륭한 것이지만,쓰레기 대책의 근본은 요컨대,줄이기(Reduce) 다시 쓰기(Re­use) 다시 활용하기(Recycle)의 3R이다. 이 3R를 이루는 방도로서 모든 제품의 「버리는 법」 표시제도를 제안하는 것이다.<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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