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파리에서 숨진 왕년의 은막스타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장례식은 파리의 마를레느 교회에서 열렸고 그의 유해는 16일 베를린 묘지에 묻혔다. 디트리히의 말없는 귀향은 60년 넘게 불편하고 소원하기만 했던 디트리히와 모국인 독일의 관계를 화해로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베를린서 연예생활을 시작한 디트리히는 31년 미국으로 건너가 대성했다. 디트리히가 30년대 은막의 섹스심벌로 인기절정에 올랐을 때 독일서는 히틀러가 집권하여 디트리히의 귀국을 종용하였으나 반나치운동에 앞장선 디트리히는 히틀러의 초청을 거부했고 2차대전이 터지자 독일군과 혈전을 벌이는 연합군 위문공연을 위해 북아프리카와 유럽전선을 순방했다. ◆그러나 독일 국민들은 2차대전중 디트리히의 연합군 위문공연을 용서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지 15년후인 지난 60년 디트리히가 공연차 베를린을 방문했을때 공연 포스터에 『반역자는 돌아가라』는 구호가 낙서되고 반대시위도 벌어져 공연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마음이 상한 디트리히는 『두번다시 고국을 찾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독일을 떠났다. ◆파리를 노후의 정착지로 정한 디트리히는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찾지 못하는 아픔을 포도주로 달래며 알코올 중독상태로 세월을 보냈고 『사후엔 파리에 묻히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얼어붙었던 디트리히와 독일간의 관계는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독일통일이 실현된후 급속히 해빙의 계기를 맞았다. ◆동베를린에 자리한 영화촬영소가 운영난으로 폐쇄위기를 맞자 그곳에서 데뷔했던 디트리히는 촬영소 존속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베를린에서는 디트리히에게 명예시민 자격을 주자는 제안이 나오기까지 했다. 디트리히의 베를린 매장에 대한 바이제커 대통령,콜 총리,디풍겐 베를린시장도 정중한 성명을 발표했다. 모국과의 단절 60년을 화해로 마무리지은 디트리히의 말없는 귀향소식에 진한 감동이 느껴지는 것은 아직도 단절의 장벽을 헐어내지 못한 한반도의 분단상황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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