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알고 있다겨우 이것이었나.
이런 꼴 보려고 지난 한달넘게 그 유별난 야단법석을 참았나. 출근길 라디오뉴스는 이종찬 경선후보의 「경선거부」 선언과,청와대 긴급대책회의의 「단호조치」 결의와,그에 따른 정국 전망을 숨가쁘게 전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기에 앞서 짜증나는 일이다. 화나는 일이다. 이럴 수 밖에 없는 우리 정치의 능력과 수준이 한심하다.
마침,길게 정체되는 차량행렬의 틈을 오가며 운전석에 배포되는 유인물이 있다. 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의 날인 5월19일을 민자당 재집권 저지의 날로 삼겠다는 재야단체 이름의 쪽지이다. 쪽지에는 민자당의 재집권이 왜 저지돼야 하는가,그 이유들이 격한 표현으로 적시되었다. 적시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민생안정과 민주개혁의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민자당은 지금 정권의 재창출이나 민생과 개혁을 말하기 이전에 당 스스로 내파하고 있음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당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만큼 치명상을 입고 있다. 쥐잡다가 독깼다. 자유경선이라는 이름의 모양새를 좇다가 당을 그르치게 생겼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진짜 까닭이 무엇인지,지나간 한달 넘게 언론매체들의 지리멸렬한 경선관련 보도를 참고 보아온 국민들은 대개 짐작을 하고 있다.
유행가 타타타에서 듣듯이 「한치앞도 몰라」가 세상 일이지만,이번 일의 한가지 원인만은 국민이 먼저 알고 있다.
경선과 관련해서 돌연 사임한 전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손주환씨는 국내 주간지와의 회견에서 「자신의 행동이 김영삼대표 쪽으로 기운듯한 느낌을 주었다면 그것은 대통령의 뜻을 어긴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고 우회해서 말했다.
그는 또 「두 김씨중 어느 한분이 지도적·역사적 역할을 맡음으로써…」라고 언급함으로써 「한 김씨」에 대한 지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를테면 이것이 진짜 「노심」의 향배였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런 「노심」 자체가 아니다. 「노심」을 감추려고 애쓴 대통령의 제스처,그러면서도 「노심」을 전파했던 이중적인 자세가 오늘의 위기를 불러온 한가지 원인이다.
○엄정중립 못믿어
「제스처에는 귀신」이라고 노 대통령을 평가한 정치학자가 있다. 언제나 국민의 인기를 의식하고 인기관리에 세심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남의 평가」에 관심을 갖는데서 오는 부정적 측면이 있다. 이런 스타일을 두고 또다른 정치학자는 「방어적 상황적응형」 지도자라고 분류한다. 전두환씨가 「저돌적 공격형」 지도자인 것과 대비된다.
6·29 선언의 완결형 대미의 뜻을 지닌 대통령후보 자유경선은 노 대통령이 시도한 민주화 노력의 제스처로서는 최상급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도중에 제기된 「노심 왜곡전파론」의 잡음을 두고 수족과도 같은 정무수석비서관을 해임하기도 했고,끊임없이 「떼를 쓰는」 열세후보를 달래기 위해 직접 불러 사정하기도 했으며,기회 있을 때마다 「엄정중립」을 강조함으로써 경선의 모양새만은 지켜내려고 온갖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의 「엄정중립」을 믿은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6·29부터 비롯된 「제스처의 정치」 「모양새의 정치」의 비극적이라고 할 중간결산이 이것이다. 이제는 앞으로의 문제가 훨씬 더 어려워졌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임기의 국정 장악력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리더십은 감화력이 전제된다. 따르는 사람들의 만족감이 없는 지도력은 지도력이 아니라 헤드십(headship)일 뿐이다. 강압적인 분위기의 두목들이 부하를 복종시키는 행위가 헤드십이다.
정치지도자는 감화력을 지녀야 한다. 감화력은 제스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순수한 것에서 나온다.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집권당의 대통령후보 자유경선이 「불발의 축제」로 끝나게 된 것은 순수하고 진실한 정치적 열정이 처음부터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후보 책임질 일
경선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당을 파국으로 몰아간 이종찬 경선후보에게 요구되는 덕목도 바로 대인다운 리더십이다. 그는 규칙답지 않은 규칙이라도 규칙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공인의 의무를 저버린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도 당을 떠나는 것이다.
당을 떠나기전에 반드시 해내야 할 일도 한가지 남는다. 물을때마다 「말 안해도 다 아는 것 아니냐」고 둘러대던 「외압」의 실체가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국민앞에 소상히 벌거벗기는 일이다. 「다 아는 것」의 모호한 실체를 국민은 똑똑하게 확인하고 싶어할 것이다.<편집이사>편집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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