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뒤늦게 국제무대에 끌려나온 한국사람의 모습은,서양사람들 보기에 매우 남루했던 것 같다. 그에 따른 서양 사람들의 모멸과 험담이 얼마나 심했던지를,우리는 아서 브라운이 쓴 「극동의 패권」(1919)에서 읽을 수가 있다. 이 책에 실린 인용문 몇을 옮겨보면.『한국 사람은 1천년전 중국사람의 창백한 유령같다』(위건=「만주와 한국」)
『수백년 독립국가임을 자랑하나,대외적인 힘의 징후가 없다. 육체적 활력을 지닌 백성들이 살고 있으나,도덕적으로는 무기력하다. 자원이 풍부하면서도,가난해서 절름발이가 됐다. 내가 알기로,이런 꼴은 모순의 땅 아시아에서도 다시는 그런 예가 없다』(커즌경=「극동의 제문제」)
『그들은 갈수록 더 게으르고,더럽고,무절제하며,부정직하고,믿을 수 없을 만큼 무지하며… 자존심이 없다. 그들은 미개한 야만인이 아니라 동양문명의 썩은 산물이다』(조지 케넌=미 오버루크지)
브라운 자신은 이런 말을 한다.
『일본 사람들의 욕망은 나라가 열강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중국사람들의 욕망은 개인적 이익의 증진이다. 한국사람들의 욕망은 혼자 있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그러나 브라운은 이런 말들이 일방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한국사람들을 보는 눈이 「세상에서 가장 멸시할 민족」과 「고난 받는 성자」라는 극과 극의 두 갈래임을 적어두고 있다. 앞것이 일본이나 중국의 눈을 통해 본 혐한파의 시각이라면,뒷것은 선교사를 비롯한 친한파의 시각이다. 비록 소수파지만,이들은 개화기 한국교회의 눈부신 성장과 박해,그리고 교인들의 미덕을 든다. 이들이 보기에,한국사람들은 택함을 받은 백성이다.
그렇다면 한국사람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1894년부터 3년사이 네차례 우리나라를 「탐험」한 영국의 여류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그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내고 있다. 비숍 부인은 마지막 시베리아 여행중,두만강 한·중·로 국경지대의 한인촌을 둘러보고,그들의 몸가짐이 「아시아적 이기 보다는 영국적」이라고 감탄한다. 이 무렵 2만명 가까운 한국이민들은,황무지를 일구어 불과 10여년만에 부촌을 이루고,자치를 즐기며 러시아인들과 어울려 살고 있었다. 그들을 보고난 부인은,당초 한국에 대해서 품었던 부정적인 생각을 버린다.
『나는 한국 체재중 한국사람은 민족의 찌꺼기이며,그들 처지는 절망적이라고 생각하기 일쑤였으나… 대부분 굶주림에 쫓겨온 저들의 번영과 몸가짐이 나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만약 한국사람들에게 정직한 정부가 있고,그들의 벌이를 지킬 수만 있다면…』(「한국과 그 이웃들」 1898)
부인의 해답은 애정을 갖고 한국을 살폈던 다른 지한파의 소견과 일치한다. 그러나 비숍 부인이 새로운 해답을 시베리아 여행에서 이끌어 냈다는 사실의 함축은 매우 크다. 그것은 북녘 언땅의 우리 교포들이야 말로,겨우 몇몇 지한파만이 통찰했던 한국사람의 자질과 가능성을 드러내 보인 선구자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에서 우리 이민사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함직도 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이광규교수(인류학)는 이 점을 침이 마르게 강조한다. 그는 지난 20여년 일본·미국·러시아·중국의 교포사회를 현지 조사한 연구성과를 마무리해 가고 있다. 그것은 응대한 「이민사관」 「이민철학」의 구상이라 할만한 것이다.
그의 구상은 이렇게 시작된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인구가 1천만,3·1운동때 2천만,광복때 3천만,지금은 남북을 합쳐 7천만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고난 속에서도 민족의 생기가 뻗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에게 물그릇을 발로 콱 밟듯 고난이 겹친 뜻은 무엇입니까. 물방울 튀듯 그들을 튕겨나가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세계의 우리 교포는 지금 5백만,중국의 3천만 화교 다음가는 세계 제2위의 이민집단이며,일본의 3백만보다 월씬 많다. 더구나 일본이민이 하와이 등 몇곳에만 집중,중국과 러시아에는 일본 교포가 한 사람도 없으나,우리 교포는 세계 도처 1백2개국에 퍼져 있다.
『이것은 엄청난 힘입니다. 일본의 국토·인구·자본·기술이 다 우리보다 앞서지만,교포만은 우리만 못합니다. 여기 우리가 일본을 이길 방도가 있습니다』
바야흐로 국제화시대를 맞아 우리교포가 교류·협력의 길잡이요,촉매가 되리란 것이다.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국제화를 선취하고,다른 민족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일민족의 전통이 너무 깊고 오래여서,남과 「더불어 사는 지혜」가 별로 없습니다. 아직은 낯선 그 지혜를,각지의 교포들이 지금 우리를 대표해서 먼저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겪는 고난은 그 수업료 아니겠습니까. 그 최근의 예가 LA 폭동입니다. 그렇다면 그 고난은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수업료를 함께 부담해야 합니다』
더구나 「더불어 사는 지혜」가 유색인종과 관련될 때,그 뜻은 인류사적 무게마저 지닐 것임을 이 교수는 강조한다.
『전세계 인구의 5분의 4가 유색인종입니다. 우리가 잘 살 수 있다면,더 나아가 총부리를 맞댔던 우리 한 겨레가 화합해 살 수가 있다면,그것은 그 5분의 4에게 커다란 희망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5분의 4와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하고 실천한다면,그것은 곧 「더불어 사는 세상」,인류의 평화와 공영에 기여하는 바가 됩니다. 이보다 더 큰 우리 민족사의 뜻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교수는 우리 의식의 전환이 시급함을 강조한다.
『왕조시대의 우리는 신민이었습니다. 지금은 국민입니다. 그러나 이제는,국제화시대이기에 더욱,새로운 민족의식에 눈을 떠야 합니다. 남과 북 7천만이 합칠 뿐 아니라 전세계의 7천5백만이 하나돼야 합니다. 그 바탕위에서 우리는,우리 교포사회가 그 곳 사회에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흑인이든 히스패틱이든,같은 소수민족인 우리 교포들이 그들을 도울 수 있게,도와야 합니다. 요즘 크게 일고 있는 LA교포 돕기나,우리 정부의 교민정책도,그만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상임고문>상임고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