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미 틈새 메우는 절호 찬스로”/유구왕국 1백년간 통치권 세번 바뀌어/현지 주민들 반미 데모속 “전통문화 찾자”【동경=문창재특파원】 오키나와(충승)가 미국통치에서 일본으로 반환된지 15일로 꼭 20년이 된다.
이날 동경에서는 미국을 대표한 축하사절로 퀘일 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기념식이 열린다.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 석학들이 참가한 심포지엄은 이미 시작됐으며 현지에서도 갖가지 행사가 열리고 있다.
미야자와(궁택희일) 일본 총리는 오키나와 반환 20주년 행사를 미일관계의 틈새를 메우는 절호의 찬스로 삼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은 동경의 행사에 애써 무관심을 표한다. 그뿐아니라 일본정부와 미국을 향해 지난 시대의 책임을 묻는 집회와 데모가 연일 반복되고 있다.
태평양전쟁말기인 1945년 3월말부터 미군정이 실시된 오키나와는 27년동안 미국령으로 편입됐었기 때문에 미일 양쪽에 착잡한 감정을 갖고있다. 전쟁중 일본 영토에서 유일한 지상전이 벌어진 이곳의 피해는 극심했다.
20만명의 희생자를 낸 가해자 미국에 대한 원한은 당연하다. 일본에 대해선 오키나와 방어전을 지원하지 않고 방치한 것과 맹목적인 자결을 종용한 것을 원망한다. 그것은 오키나와 차별의식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어서 더욱 미묘한 감정으로 변했었다.
그러나 지나간 20년동안 일본정부가 오키나와 부흥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결과 주민들의 감정은 크게 완화됐다. 아사회 신문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오키나와 반환이 잘된 일이라고 평가하는 주민은 반환당시의 55%에서 지난 4월에는 88%로 늘었다. 우선은 경제적으로 궁핍을 면한 탓이다.
반환이후 일본정부는 홋카이도(북해도) 개발청을 「홋카이도 오키나와 개발청」으로 바꾸어 20년동안 2차례의 진흥개발 계획 사업에 3조4천억엔을 퍼부었다. 그 결과 주민의 소득이 일본 전국 평균의 60%에서 80%로 향상됐으며 도로 포장률은 전국 평균을 상회하게 됐다.
반환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본토와의 교류가 늘어난 것,공공시설이 좋아진 것,산업이 발전한 것 등이다.
그러나 경제면에서 주민들의 불만은 아직도 크다. 각 지방별 주민소득은 여전히 오키나와가 47위로 최하위이다. 연간 1인당 소득은 동경이 4백25만8천엔인데 비해 오키나와는 1백89만2천언에 불과하다. 산업이 발전됐다고 하지만 제2차 산업은 전국 평균의 22%선이고 그중 제조업 분야는 7%밖에 안된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이 현내에서 취직하지 못하고 본토로 몰려들고 있다.
또 한가지 불만은 미군기지이다. 일본 전국의 미군 전용시설 75%가 이곳에 집중돼 전체 섬면적의 19.6%를 점하고 있다. 오랜 기지반환 투쟁서 일본에 넘어온 땅들을 자위대가 차지한 불만도 크다. 최근에는 캄보디아 평화유지활동(PKO)기지를 이곳에 만들겠다는 아카시(명석강) 유엔 캄보디아 잠정통치기구(UNTAC) 대표의 발언에 자극돼 맹렬한 반발을 보이고 있다.
이런 복잡 미묘한 주민감정은 자연히 오키나와 고유문화에 집착하는 민족의식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반환 20주년을 계기로 오키나와 무용 요리 등 전통문화를 되찾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19세기말까지는 형식적이었지만 독립왕국 이었다. 위치상 일본 중국 한국과 등거리 외교를 해온 유구왕국은 1879년의 유구처분(중승현설치)으로 일본의 한 현으로 편입됐다. 유구란 나라이름을 살리기 위해 주민들은 대학 신문사 은행에 이 이름을 고집하고 있다.
1백년 남짓한 세월에 세번이나 통치권의 변동을 겪었던 유구의 후예들이 완전한 일본인으로 동화되기에는 점더 세월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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