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재단 설립/19살때 도일 온갖 고난끝 2조엔 재산 일궈/“한국학생들 많은 응모 기대”/독학 대졸 빠찡꼬업 투신 세계 30대 부자로【동경=문창재특파원】 한국 출신의 귀화일본인이 5백억엔(한화 약 3천억원) 기금의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일본 제일의 부자이며 세계 30대 부호안에 꼽히는 나카지마 겐기치(중도건길·71) 이사장은 처음 응한 한국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또렷한 우리말로 『특히 한국학생들의 많은 응모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5벡억엔의 기금은 사설 장학기금으로는 일본에서 최고액이며,노벨평화재단 기금의 두배에 가까운 거액이다.
재단 이름은 「평화중도재단」. 자신과 회사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유독 평화를 사랑하는 인생철학을 나타내고 싶었다.
나카지마씨는 89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 9월호가 발표한 세계 30대 부호명단에 처음 이름이 실려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 당시 그의 재산은 5천억엔 정도로 세계 27위였고 처음으로 일본 1위에 올랐다. 포천지는 그때 나카지마씨의 사진을 표지에 크게 싣고 그 주위에 엘리자베스여왕 등 다른 대부호들의 작은 사진들을 곁들였었다. 상속재산이 아니라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인물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감회가 깊습니다. 맨주먹으로 일본에 와 뼈가 문드러지는 부두노동을 해가며 공부한 사람이니 그런 처지의 학생들을 돕고 싶은 것이지요』
나카지마씨는 정동필이란 본명을 가졌던 시골 우등생이었다. 1922년 충북 청주근교에서 소작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야학에 다니다 국민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어렵사리 국민학교는 마쳤으나 중학교에 갈 길이 막연했다. 가난에 찌들린 생활을 박차고 집을 나가 술집여자가 된 누나의 도움으로 그는 청진의 중학교에 1등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누나의 죽음으로 정어리공장과 고깃배에서 품을 팔아가며 학업을 계속해야했다.
졸업후 만주철도에 취직했지만 일본인의 반도 못되는 월급에 낙심한 그는 19세때 맨손으로 도일,동경시 바우라(지포) 항구의 부두노동자가 되었다. 큰 화물선이 싣고온 철도레일을 어깨에 메어 나르는 노동을 하며 와세다(조도전) 대학전문부와 다쿠쇼쿠(척식)대학 상학부를 졸업할 수 있었다.
『전후 곧 귀국하려했지만 국내사정이 너무 혼란해 차일피일 기회를엿보다 눌러앉게 됐습니다』
그때 재일한국인들이 앞다투어 뛰어든 빠찡꼬업에 손을 댄것이 오늘날 일본 최대의 빠찡꼬기계 메이커 창업의 시작이었다.
(주)평화의 연간매출액은 7천5백억엔(92년도 추정)이고,경상이익은 2천5백억엔. 나카지마사장의 개인재산은 2조엔정도로 추산된다.
지난 3월23일 일본 문부성의 인가를 받은 재단은 현재 장학생모집요강 등 구체적인 사업계획 수립에 분주하다.
일본으로 공부하러오는 외국대학생 50명에게 월 10만에,대학원생에게 월 12만엔씩을 지급할 생각이다. 지급기간은 원칙상 1년이지만 1년 연장도 가능하다.
일본인으로 해외에 유학하는 학생에게는 대학생 15만엔,대학원생 20만엔씩을 2년간 지급한다. 이밖에 국제공동연구 및 교류사업을 지원하고,교육·학술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등 다각적인 문화사업도 계획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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