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언론인 이경성 회고록』의 출판기념회가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언론 외길 34년을 살다간 「성깔있는 기자」의 1주기를 기억하는 모임이었다.고인은 한국일보 출판국장(이사대우)을 정년퇴직한뒤, 틈틈이 회고록을 썼더라고 한다. 『회고록』은,여기에 그가 평소에 써서 발표했던 글,젊은시절 미국 연수중 현지 신문에 실렸던 그의 영문기사와 사설,친지들의 추억담을 곁들여 엮었다. 모두가,「기자는 자존심을 먹고 산다」고 했던 그의 성품과 행적을 잘 드러낸 글들이다. 그중 덮었던 책을 다시 펴 거듭 읽은 것은 책머리에 실린 한 통의 편지,고인이 북녘에 두고 온 누이동생 영례 앞으로 쓴 배달불능한 편지였다. 5백자 미만의 길지 않은 편지는 이런 말들을 담고 있다.
『영례야/보고싶다/정말로 보고싶다/나도 이제 63세 할아버지가 되었다/혹시(너는) 죽어 이 땅에 없지 않을까 하는 방정맞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절망은 않는다.
『우리 죽기전에 한번 만나야지/이제 통일은 몰라도 남북이 서로 왕래하며 만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만 같다. 기대해 보자/우리 죽기전에 한번 만나 실컷 부둥켜 안고 울어 보자』
편집자 주기인즉,고인은 이 편지를 별세하기 10개월전에 썼다. 직장암이 상당히 진행돼,통증으로 밤잠을 못이루던 무렵,편지의 글씨는 흐트러져 있었다고 한다. 본인도 남은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기대해 보자」고 쓰는 그의 심정은 얼마나 처절했을까.
그래서였던지,그는 편지와 함께 메모 한장을 남겼다.
『찾을 사람 이영례(60세) 영례는 1947년 가을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금학리 18번지(선골)에 살다가 화성면 송천리 더르네 우윤재씨에게 시집갔다….(후략)
찾는 사람은 서울에 사는 언니 덕임(70세) 오빠 경성(63세)』
이 메모의 뜻은,먼 훗날에라도,아버지를 대신해서,고모를 찾으라는 당부일 것이다. 바로 「언론인 이경성」이 아닌 「인간 이경성」의 유언인 셈이다. 그가 언론인으로서 먹고 산다던 「자존심」보다 더 깊은 곳에 응어리졌던 「한」이 그 행간에 스며 있다.
「인간 이경성」의 아픔이,불현듯 일전에 읽은 단편소설 한 편을 떠올리게 했다. 「현대문학」 4월호에 실렸던 홍상화의 『유언』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자면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72년 평양을 처음 찾았던 남북적 우리측 대표단이 평양체재 첫 저녁에 본 영화가 「혁명투쟁의 진리를 밝힌 고전적 본보기」라는 『꽃파는 처녀』였다. 타이틀 롤의 홍영희는 16살에 김정일의 눈에 들어 발탁이 됐다는 신데렐라,지금의 북한의 1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초상의 주인이다.
그런데,기구하게도 홍영희의 아버지는 그녀가 10살 때 헤어진 남파간첩 홍승현이다. 자수한 홍승현이 남에서 사업가로 성공하는 동안,홍영희는 스타의 길을 걸은 것이다. 작가 홍상화에게는 홍승현이 당숙,홍영희는 6촌이다.
작가 홍상화는 이 사연을 장편 『피와 불』(89년)에 담았다. 홍승현은 일본 영화잡지에 실린 딸의 사진을 보물처럼 간직한채 위암으로 죽었다.
『유언』은 말하자면 『피와 불』의 뒷얘기다. 재작년 10월 뉴욕에서 열린 남북영화제에 홍영희가 참석한다는 말을 듣고,작가는 우리측대표단과 함께 뉴욕으로 간다. 당숙의 죽음을 알리고,『피와 불』의 합작영화제작을 제의할 생각도 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너무나 순진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홍영희는 남에 피붙이가 있음을 부인한다(조선일보 90.10.10∼12).
이 상처가 아물 무렵 작가는 생면부지인 사람의 전화를 받는다. 전화의 주인공은 당숙의 처남,그러니까 홍영희의 외삼촌 우형섭이다. 대학병원에서 만난 그는 말기장암 환자였다. 그는 홍승현이 죽기 직전 그와 해후했던 일을 말하고,낡은 수첩을 뒤적여 홍승현의 사망일시와 산소자리를 말했다. 『영희가 오면 아버지묘소라도 찾고 제사라도 지내도록…』 이런 말도 했다. 그날 밤 수술중에 죽은 우형섭의 장례에서 작가는 당숙의 무덤앞에 앉은 홍영희를 그려본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내가 이제부터 노인(우형섭)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노인의 부탁을 이행할 수 있도록 통일이나 민족교류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살아있는 것이다.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언론인 이경성 회고록』을 받아 본 다음 날은 마침 신문도 없는 어린이 날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멍청한 가운데,남북총리회담 북측 대표단의 입경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 봤다. 그러면서 왕래는 있으돼 진전이 없는 대회가 언제까지 계속될까,그 사이 또 사연많은 「유언」은 얼마나 쌓일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은 이번 총리회담이 예상밖의 진전을 보였다는 신문보도를 읽으면서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비록 이번 총리회담이 3개 공동위와 판문점연락사무소 설치에 합의했다고는 하나,여기서 다룰 「본안」 타결의 전망이 선 것은 아니다. 그 사이 총리회담의 실무접촉 결과가 이를 말해준다. 대책이 있다면 인내를 가지고 접촉을 계속하는 것 뿐이다. 우리 정부가 그 사이 자제해온 경제협력 방안 등을 당장에 재개할듯이 나서는 것도,아직은 너무 호들갑스럽다.
그러면 이번 총리회담의 또다른 성과라는 8·15 고향방문단은 어떤가.
그 대답은 1천만이라는 이산가족 숫자와 1백명이라는 방문단원 숫자를 대비하는 것으로 족하다. 1백명 고향방문단은 1천만의 아픔을 호도하는 「탈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이 이산가족 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될 수 없음도,우리는 85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러니,이제라도 정부는 고향방문단 방식을 아예 버리는 것이 옳다. 그보다는 이산가족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해,핵문제와 버금가는 남북대화·협력의 전제로 내세워야 마땅한 것이다. 믿건대,그것이 이산가족문제 해결의 첩경이다. 오늘도 곳곳에 쌓일 「유언」의 사연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상임고문·논설위원>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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