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같은 대통령중심제하에서 국무총리의 위상은 참으로 어정쩡하다.헌법상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고 행정에 관해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하며 대통령을 대리하여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뿐인가,대통령이 유고됐을 때는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는 승계권을 갖고 있는 등 법적으로는 정부의 제2인자인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법적 지위와는 달리 현실적으로는 정부운영의 권한과 재량은 지극히 제한적이기만한 것이다. 그래도 제1공화국 시절의 총리는 비록 부통령이 있기는 해도 대통령 못지않게 정례 기자회견을 갖고 국내외 문제와 국정운영의 방향에 대해 자신있게 의견을 개진했고 이런 관례는 제3공화국 초반까지 어느 정도 지속되던 것이 유신시절부터 완전히 없어졌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20여년동안 국무총리의 활동과 역할은 크게 변질·축소되고 말았다. 즉 총리는 국민의 심부름꾼이기 앞서 임명해준 대통령의 충직한 고위 심부름꾼으로서 정치문제에는 아예 외면할 뿐더러 중요한 내외문제에는 일체 함구하고 기자회견은 하지 않는 것으로 굳혀왔다. 즉 침묵속에 대통령의 의중을 읽고 알아서 일정범위안에서 일을 추진하고 또 대통령을 대리해서 각종 기념식에 나가 치·식사를 대신 읽는 이른바 「대독 총리」 「침묵 총리」로 바뀐 것이다.
5공때 모총리가 지방을 둘러보고 『농촌은 지금 태평성대와 같다』고 말했다가 크게 빈축을 산적이 있다. 통치권자에게는 최고의 찬사였겠지만 비민주적 통치로 숨을 죽이고 지내던 국민들,점점 어려워져가는 농정에 근심하던 농민들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이었던 것이었다.
이러니 총리를 보는 국민의 시각과 평가가 어떠하겠는가.
지난주 신현확 남덕우 이한기 강영훈씨 등 총리를 지낸 네분이 한 연구소 세미나에서 실로 오랜만에 침묵을 깨고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및 남북관계의 문제점에 관해 의견을 제시해 주목을 끌었다. 이분들은 각기 전문분야에서 오랫동안 경륜을 쌓은데다 한결같이 나라가 매우 어려웠던 시기에 총리로 재임했었기 때문에 이번 진단과 처방은 매우 값지고 귀중한 것이였다.
네분은 오늘날 정치는 전근대적인 붕당정치로 전락했고 경제는 탈진되어 비틀거린지 오래며 사회는 정당한 권위마저 무너졌는가 하면 북한의 2중전략은 여전하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따라서 정당과 지도자는 분명한 이념과 정책의 제시로 신뢰를 회복해야 하고,경제는 금리와 환률을 연계 운용하고 업체별로 전문화가 시급하며 지도급 인사들은 희생적 실천으로 사회의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바른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듣는 국민들은 반가우면서도 착잡하기만 하다. 이같은 숙제는 30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한데 그토록 경륜과 식견을 지닌 그분들이 왜 재임때는 이런 지적과 견해를 피력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 처방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다면 대통령에게 자리를 걸고 간곡히 건의 직언 충언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그대로 덮어두고 만것인지….
직언 정언도 때를 맞춰야하고 또 이를 관철시켰을 때 황금이 되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네분의 국가적 숙제에 대한 의견피력은 크게 반기는 입장이다. 다만 이제부터라도 국무총리와 장관들은 재임때 국가적 병에 대한 치료대책을 시기를 맞춰 자리를 걸고,당당하게 직언해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아무리 대통령제하지만 「침묵 총리」 「몸조심 총리」는 하루빨리 탈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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