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먼저 도덕성을 묻자/정달영(화요칼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먼저 도덕성을 묻자/정달영(화요칼럼)

입력
1992.04.28 00:00
0 0

○작가출신 대통령바츨라프 하벨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 대통령이 서울을 공식방문중이다. 그는 널리 알려진 작가출신 대통령이다. 지난 20여년간 자주 투옥되고 탄압받던 「투사」로서 그의 이름은 기억되어 왔다.

그가 작가인 것은 지식인 문사의 여기로서가 아니다. 천직과 본분으로서의 작가이다. 그는 대통령직을 떠나는 대로 극작가로 복귀하겠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에게 있어 대통령직은 여분에 가깝다.

하벨 대통령은 자신의 연설문을 직접 쓰는 대통령이다. 남이 써주는 경우도 물론 있으나 그때에도 고쳐 쓰느라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고 말한다. 연설문 집필은 시간 손실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점이 있다는 것이 대통령 자신의 설명이다. 「말의 힘」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유리한 점이다. 그는 말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몇마디 말이 10개 사단 병력보다 강력하다」는 사실을 그 스스로 목격한 증인이기도 하다.

「말에 관한 말」이라는 제목의 연설문은 말의 힘과 말의 함정,말의 책임에 대해 서술한 하벨의 명문장이다. 1989년 10월에 그는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가 수여하는 「평화상」을 받으면서 이 연설문을 썼다.

이 글에 의하면 1968년의 「프라하의 봄」에 하벨의 친구 루드빅 바츨리크는 「2천단어」라고 제목을 붙인 성명서를 썼는데,이 성명서는 곧 온 나라를 술렁거리게 만들었고,드디어는 소련군 탱크의 체코 침공구실이 되었다. 말의 힘을 보여준 일면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진실과 자유만을 어둠속의 불빛처럼 보여주는 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독묻은 화살처럼 거짓도 속임수도 있고 해로운 말,악의에 찬 말도 있다. 어떤 말은 선과 악의 양면을 동시에 지닌다.

가령 「사회주의」라는 말만해도 지난날 전제군주에게 탄압받던 사람들에게는 목숨까지도 걸만한 매혹적인 단어였으나,하벨이 속했던 나라에서는 관료들이 진보적 성향의 친구와 시민들을 밤낮없이 두들겨패는 「곤봉」의 뜻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정치의 실패

하벨이 경계하는 것은 말의 함정이다. 같은 말이라도 한순간 「겸손」으로 나타나는 것이 다른 순간에는 「오만」으로 변한다. 인간이 무엇을 이뤘다고 해서 그로써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오만이다.

여기서 말의 책임문제가 제기된다. 하벨에 의하면 말의 책임은 도덕의 문제이다. 말이 어둠속의 빛이 되거나 말의 진정한 힘을 획득하자면 도덕성에 기초하지 않고는 안된다.

하벨이 「프라하의 봄」에 시작해서 「77헌장」으로,다시 「시민포럼」에서 대통령으로 되기까지 한결같이 의지해온 덕목은 도덕성을 바탕으로한 말의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작업복차림의 그가 벤체슬라스 광장의 30만 군중에게 『그 누구도 우리의 평화로운 혁명을 더럽힐 수 없으며,진실과 사랑은 거짓과 증오를 이겨내고야 말 것』이라고 외쳤을때 이미 체코의 「벨벳혁명」은 열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평화상」 수상 한달뒤 「시민포럼」을 주도했고,다시 한달 뒤에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것이 모두 1989년 마지막 두달동안 일어난 일이다.

하벨은 그의 임시대통령 기간을 포함한 2년반의 첫 임기를 마무리하는 중에 서울을 찾았다. 아마도 오는 7월이면 그는 두번째 임기에 재취임할 것이다.

마침 그를 맞이하고 있는 서울에서는 집권당의 대통령후보 경선과 연말안으로 있게될 대통령선거가 치열한 관심사이다. 하벨때문이 아니라,우리 정치의 도덕성에 두눈 부릅뜬 관심을 두지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 지난 반세기 우리 정치의 실패가 도덕성을 확보하지 못한채 전개된데서 초래되었음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고려대 한승조교수는 1992년의 선거를 정조준해서 써낸 신간 「한국정치의 지도자들」에서 새로운 정치지도자의 식별기준 8개항을 열거했다. 그 첫번째가 단연 「도덕성」이다. 정치인에게는 특히 행위동기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행위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도덕성이 엄중히 요구된다. 나라의 안정과 선진화를 위한 건곤일척의 선택으로서 「제13대 대통령」을 고를때,무엇보다도 도덕성이 최우선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성의 기초가 무시되었거나 없었기 때문에 「실패」한 경우는 6공화국도 좋은 보기이다.

6공이 여러가지 생색나는 민주화조치를 추진하고 실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불안과 사회혼란,그리고 경제의 전반적인 쇠퇴에 직면하게 된 것은 집권세력 지도층에 「도덕성의 기초」가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외형적인 변화,제도적인 개선만으로 민주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도덕성의 기초가 단단히 전제되어야만 진정한 민주화가 성취될 수 있다.

○지식인이 해낸 것

바웬사가 주도한 폴란드의 혁명이 조선소 노동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면 하벨이 주도한 체코의 혁명은 지식인들의 「외침」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지식인들,지도층의 도덕성,양심이 일구어낸 혁명이 체코의 경우이다. 하벨 대통령은 그런 점에서 그가 잠시 들러가는 서울에 좋은 교훈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정치지도자에게 다짐할 것은 「도덕성이 첫째」라는 진리이다.<편집이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