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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진 민족주의/하와이도 “독립바람”(특파원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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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진 민족주의/하와이도 “독립바람”(특파원리포트)

입력
1992.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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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 독자세관·납세거부 운동/연방정부 재정지원등 「무마」 고심【호놀룰루=이상석특파원】 냉전종식 이후 거세게 일고 있는 민족주의 파고가 태평양에도 넘실대고 있다.

약 1백년전인 1893년 1월 미국 해군의 침공에 따른 미 본토와의 합병으로 「나라」를 잃은 하와이 토착민들이 최근들어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강화하고 있다.

하와이인들의 독립운동은 멀리는 지난 60년대 흑인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권운동에 자극받은 것이지만 가까이는 구 소련 붕괴이전에 있었던 발트3국의 독립과도 무관치 않다고 현지 사회학자들은 설명한다.

이 운동을 추진중인 인사들은 ▲하와이인으로 구성되는 독자적인 세관창설 ▲연방정부에 대한 세금납부 거부 ▲미국의 사법관할권 부인 등의 방법을 통해 자결권 쟁취운동을 벌이고 있다.

또 일부 학교에선 국가에 대한 서약이나 국가제창시 기립거부 등의 수단으로 노골적인 반미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와이 독립운동을 추진중인 「친하와이 주권작업반」은 23일 회의를 열고 하와이에 대한 미국의 「범죄」를 재판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1백년간에 걸친 하와이 수탈의 역사를 대내외에 알려 하와이를 주권국가로 인정하도록 미국정부에 압력을 가한다는 방침이다.

미국의 범죄재판 날짜 및 장소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미국의 하와이 침공 1백주년인 내년 1월17일 호놀룰루의 이올라니궁이 유력하다.

하와이는 원래 태평양상의 여러 섬들에서 이주한 폴리네시안계 토착민 소유였다. 순수 토착민수는 현재 약 4천명 정도(하와이 총인구 96만5천명)로 추산된다. 하와이는 1778년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발견할때까지만 해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섬이었으나 카메하메하 1세(1779∼1819)때부터 중국 영국 미국 등과 교역을 시작했다.

1887년에는 21개국과 수교를 했으며 세계 최초의 국제기구라 할 수 있는 만국우편연합(UPU)에 가입한 최초 회원국중 하나였다.

19세기말 사탕수수가 쿠바로부터 들어오고 보스턴에 수출을 시작하면서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이 사탕수수 상인과 함께 하와이에 진출했다. 이어 태평양에 전진기지를 물색하던 미국 군부의 입김으로 미국은 당시 하와이와 맺었던 쌍무조약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더 나아가 펄하버(진주만)에 대한 조차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당시 하와이 왕이었던 칼라카우아가 거부하자 상권과 언론을 장악하고 있던 선교사 그룹은 국왕에 대한 온갖 루머를 유포시켜 그를 음해했다. 그가 끝내 회유되지 않자 아예 총칼을 들이대 왕위를 찬탈하고 말았다.

칼라카우아왕은 189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하와이인들은 아직도 미국 선교사 일당이 그를 살해 했다고 믿고 있다.

왕위를 승계한 릴리우오 칼라니 여왕은 1893년 1월14일 새헌법을 제정해 왕권을 회복하려 했으나 이틀뒤인 16일 선교사일당은 소위 「공안위원회」를 결성하고 미 해병 1백62명을 끌어들여 왕궁일대를 장악,마침내 1월17일 정권을 접수해 독립왕조의 숨통은 끊어지고 만다.

이어 1894년 7월4일 미국인들이 진주만에서 축포를 쏘며 독립기념을 축하하던 날 당시 괴뢰정부 수반이던 샌포드 돌 임시정부 대통령은 「하와이공화국」 탄생을 선언했다.

하와이공화국은 선교사 그룹을 주축으로 한 5개 대기업의 후원을 받아 하와이의 언론과 정치 경제를 차례로 장악했으며 개발이란 명목하에 원주민 동화작업에 들어갔다.

특히 언론은 앵글로 색슨족(백인)의 우수성을 퍼뜨리며 하와이인에 대한 철저한 세뇌교육을 실시했다.

이에 따라 당시만해도 하와인으로 불리던 원주민들은 각기 중국계,필리핀계,한국계 미국인 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학교에선 영어교육이 시작됐으며 하와이 고유의 전통과 예술은 속속 사라져갔다.

미국정부는 30여년간에 걸친 이같은 세뇌교육을 마치고 1959년 형식적인 주민투표를 거쳐 하와이를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시켰다.

이런 사실은 미국 각급학교의 역사교과서에도 자세히 언급돼 있지 않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와이인들의 독립운동은 미군의 하와이침공 1백주년인 내년을 고비로 절정에 이를 전망이어서 미국 연방정부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와이주 상하원은 원주민들의 탈미 움직임을 무마하기 위해 내년을 「하와이 독립국전복 1백주년이 되는 해」로 결의했다. 하지만 하와이인들의 독립운동이 실제로 이루어지리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의 한 민족문제 전문가는 『하와이가 제2의 발트3국이 될 가능성은 제로(0)』라고 말하고 『다만 미 연방정부가 경제적인 보상으로 아메리카 인디언문제를 해결했듯이 하와이 침공에 대한 사과와 함께 하와이 원주민에 대한 재정적인 보상으로 이들의 독립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하와이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하와이문제 향상을 위한 연구소」의 푸아나니버기스 부소장은 『우리가 주장하는 독립의 개념은 외국의 간섭이 없는 완전한 독립과 주권회복을 뜻한다』고 말하면서도 하와이가 실제로 미국으로부터 독립하려면 수많은 세월이 걸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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