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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포교수 4·19묘역서 애끊는 명인/이창섭씨,수유리 형 묘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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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포교수 4·19묘역서 애끊는 명인/이창섭씨,수유리 형 묘비 찾아

입력
1992.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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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단신 귀국… 시위중 총탄 맞아 숨져/중국서 25년만에 참변소식 듣고 고국방문18일 하오 봄비에 젖은 서울 수유리 4·19 희생자묘역을 찾은중국교포 이장섭교수(55·서강대 교환교수)는 묘역한켠에 외로이 서 있는 친형 「이강섭열사」의 묘비앞에 엎드려 오랫동안 울고 있었다.

9살때 헤어져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앳된 모습의 형을 회상하는 이 교수의 뇌리에는 이역만리에서 헤어져 살아온 한많은 「가족사」가 뒤섞여 지나갔다.

형 강섭씨는 일제하이던 지난 31년 세무공무원이던 아버지가 새로 부임해간 만주하얼빈에서 5형제중 맏이로 태어났다.

만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해방을 맞아 강섭씨는 『해방조국에서 학업을 계속 하겠다』며 단신 귀국,서울 돈암동 큰아버지댁에 머물렀고 부모와 동생 4형제는 살림살이를 정리하다 시기를 놓쳐 중국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강섭씨는 서울 경동고등학교를 졸업,50년 서울대 문리대 지질학과에 입학했으나 몸이 약해 곧바로 휴학했고 그해 6월 피란도 가지못한채 전쟁을 맞았다.

강섭씨는 전쟁이 끝난뒤 54년 일시 복학을 했지만 만성폐질환이 도지는 바람에 결국 3학년때 학업을 다시 중단하고 경남 마산의 결핵요양원에서 장기투병생활을 하기도 했다. 취직도 못한채 유일한 취미이던 바둑만으로 소일하던 강섭씨는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위대열에 동참했다.

강섭씨의 행적에 대한 유일한 증언자인 큰어머니 윤장자씨(87)는 강섭씨에 대해 『내성적이었지만 당시의 부패한 정권에 분노를 터뜨리는 등 곧은 성격이었다』며 『데모대에 못끼도록 옷과 신발을 숨겨놓기도 했지만 결국 허사였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시위가 절정에 달한 19일 집을 나간 강섭씨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이튼날 큰어머니 윤씨 등은 데모희생자가 많이 수용되었던 혜화동 수도병원(구 고대 부속병원자리) 지하실에서 강섭씨의 싸늘한 시신을 발견했다.

종로경찰서 근처에서 시위를 하다 경찰의 총에 왼쪽 허벅지를 맞고 출혈과다로 숨졌다.

강섭씨의 사망소식이 만주의 가족들에게 전해진 것은 무려 25년이 지난 85년 여름이었다. 조국에 남아있을 형과 친척의 소식이 궁금해 KBS 사회교육방송의 이산가족찾기 프로를 듣던 이 교수가 큰어머니 윤씨의 애절한 음성을 듣게 된것.

편지왕래끝에 지난 89년 12월 난생처음 조국땅을 밟은 이 교수는 재직중이던 하얼빈과학기술대와 서강대가 자매결연을 맺음에 따라 지난 90년 4월 교환교수로 한국에 왔다.

이 교수는 부친은 50년대 말 망향의 한을 품고 병사했으나 이 교수가 명문 북경청화대에 조선족으로는 처음으로 합격하는 등 4형제 모두 이공계통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 교수는 오는 8월이면 다시 중국에 돌아가야한다.

『우리의 가족사는 불행했던 우리민족사의 한 단면』이라는 이 교수는 『큰형을 잊지못하던 어머님이 지난 84년 숨을 거두며 시신을 화장해 강섭이가 있는 고국에 흘러가도록 송화강에 뿌려달라고 했었다』며 또 울었다.<이성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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