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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시로 현역신분 한독당 입당/「백범암살 전후」 안두희씨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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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시로 현역신분 한독당 입당/「백범암살 전후」 안두희씨 고백

입력
1992.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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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백범 밑에 빨갱이 득실” 세뇌/범행후 “안 의사 수고했소” 칭찬백범 암살범 안두희씨는 사건 43년만에야 자신의 단독범행 주장을 철회하고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대장 김창룡(당시 소장)의 사주에 의한 범행임을 밝혔다.

안씨의 진술에 의하면 김창룡의 백범암살 계획은 최소한 사건발생 반년이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돼왔다.

평북 용천 출신으로 육군 포병소위였던 안씨는 당시 평안도 출신 반공청년들의 모임인 「서북청년회」에 가입,적극적인 우익활동을 하던중 같은 서북청년회 회원인 장모대위와 신모 중위의 소개로 처음 김창룡을 만났다.

안씨는 방첩대 장교인 장모 대위 등을 따라 대장실에서 김창용과 첫 대면했던 이 시기를 「서북청년회 활동 당시」로만 기억하고 있으나 범행 넉달전 김창룡의 지시에 따라 백범의 한독당에 입당한 것을 감안해볼때 48년말과 49년 초기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안씨는 이후 김창룡과 여러차례 만나 백범제거의 「당위성」을 설득 당하고 이어 49년 2월에는 김창룡이 『백범에게 접근할 길을 찾아보라』는 말을 듣고 서북청년회원 홍종만씨 소개로 한독당에 입당했다.

안씨는 김학규 한독당 조직부장의 소개로 백범을 만난 자리에서 『평소 가까이 모시고 싶었으며 저의 선친도 신의주에서 구리수집상을 하면서 독립군에 자금을 댔었다』고 말해 백범의 환대를 받았다.

김창룡은 안씨가 수시로 경교장을 드나들 정도로 백범의 개인적 신임을 얻게되자 그해 4월말부터 5월말까지 4,5차례 집중적으로 안씨를 불러들여 백범암살을 세뇌시켰다.

김창룡은 당시 『백범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됐다』 『백범 밑에는 빨갱이가 득실거린다』 『그러므로 백범은 사라져야 한다』고 반복해 강조했다.

안씨는 또 이때에 즈음해 미 OSS소속이라는 모 미군중령과 자주 만나 백범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고 밝혔다. 이 미군 중령은 반도호텔 커피숍 등지로 안씨를 불러내 『「블랙타이거」(백범호칭) 밑에서 숱한 빨갱이들이 암약하고 있다』며 백범암살에 대해 강한 암시를 주었다고 안씨는 기억했다.

안씨는 또 이 미군중령은 이전에 장택상 수도청장과 조병옥 경무부장의 소개로 만나 알고 지내던 사이였으며 주로 국내정세와 인물들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누었다고 말했다.

안씨는 그러나 이 미군중령과 김창용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자신도 이 중령으로부터 직접 『암살하라』는 식의 얘기는 듣지 않았다고 밝혔다.

안씨는 당시 『김 대장으로부터도 직접 암살지시는 없었으나 끈질기게 백범제거의 당위성을 설명한 것은 지령이나 다름 없었다』고 말했다.

안씨가 백범을 암살하기 직전인 6월23일과 25일 2차례 암살기도가 있었으며 당시 범행에 가담했던 홍종만 등이 안씨와 공범이었음을 폭로한 적이 있으나 안씨는 이에 대해서는 『그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단지 정치브로커인 김지웅씨가 주도했던 것』이라고 부인했다.

안씨는 마침내 6월26일 부대전출 인사를 위장,상오11시께 단신 경교장으로 들어가 면회차례를 기다리다가 정확히 낮 12시35분 2층 거실에 올라가 갖고 다니던 권총으로 백범을 저격,암살했다.

안씨는 범행직후 스스로 권총을 바닥에 던지고 현장에 순순히 연행됐다. 헌병대로 끌려간 안씨는 곧바로 방첩대 영창으로 이송됐으며 이때 김창룡이 찾아와 『안 의사』라고 호칭하며 『수고했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이때 김창용이 『모닝커피를 좋아한다고 얘기를 들었는데 영창에서도 사병에게 얘기하면 언제든 편의를 봐주겠다』고 말했으며 실제로 안씨는 영창에서 술·담배·고기 등을 즐기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안씨는 또 영창에서 백범암살 과정을 담은 「시역의 수기」를 집필했다. 이 내용이 안씨의 단독판단과 「결행」으로 암살이 이루어졌음을 주장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안씨는 『당시 김 대장으로부터 구체적인 사후보장 약속은 받은바 없다』고 말했으나 종신형에서 15년형으로 감형돼 수형생활을 하던 중 6·25동란이 발발하자 헌병들을 지휘하는 등 장교업무를 수행했고 50년 7월에는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다시 소위로 재임관돼 파격적인 진급을 거듭,53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안씨 스스로 이에대해 『김 대장이 뒤를 봐주었을 것』이라고 시인하고 있다.

안씨는 예편후에도 강원 양구에서 건설회사와 군납공장을 경영하면서 한때는 강원도내 소득세 1위 납부자가 될만큼 「배려」를 받았으며 56년 김창룡이 암살되기 전까지 꾸준히 교분을 계속했다.

4·19가 나자 자취를 감췄던 안씨는 이듬해인 61년 4월19일 「백범 시해진상규명위」 회원에게 붙잡혔으나 공소시효가 끝나 풀려났으며 이후 은둔생활중 숱한 피습위협에 시달리면서 지난 77년에는 미국이민을 기도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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