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파타」 결성 대이스라엘 무장투쟁 선봉/수차례곤경 「줄타기」로 극복… 최근 입지약화8일 리비아상공에서 발생한 비행기사고로 생사여부가 불투명했던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것으로 밝혀져 그의 끈질긴 생명력에 전세계가 감탄하고 있다.
무려 50여차례나 암살위기를 넘겨 『항공기에 탑승했을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는 아라파트가 믿었던 비행기마저 불시착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민족을 14시간동안 조절과 절망에 빠뜨렸던 아라파트의장은 지난 53년동안 팔레스타인 독립투쟁을 주도해온 팔레스타인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지난 69년 PLO의 제2대 의장으로 선출된 후 이스라엘에 빼앗긴 고향을 되찾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투쟁해온 것이다.
1m70의 단신에 짧고 거친 턱수염과 체크무늬 스카프로 유명한 아라파트는 상대인 이스라엘에겐 테러리즘의 「대부」로 악명높았지만 5백만 팔레스타인 민족에게는 구국투사로 칭송받았다.
1929년 카이로서 태어나 카이로대학을 졸업한 그는 젊은시절 쿠웨이트로 건너가 건설회사를 경영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등 천부적인 사업가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아라파트는 59년부터 팔레스타인 동포의 비참한 생활상과 아랍진영의 무관심에 분노,팔레스타인 해방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그는 65년 지하게릴라 조직인 「파타」를 결성,이스라엘 본토에 침투시키는 한편 팔레스타인계 군소 저항조직을 규합해 아라파트 왕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아라파트의 시련도 이때부터 시작했다. 아라파트와 라이벌관계인 후세인 요르단 국왕이 70년9월 자국내 팔레스타인 조직의 거점을 공격한 소위 「검은 9월」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아라파트가 이끄는 PLO가 레바논으로 철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레바논에서 전력을 재정비한 PLO는 또 다시 이스라엘 대한 무력투쟁에 나섰지만 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침공과 주변 아랍국의 압력으로 또 다시 베이루트에서도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아라파트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라파트를 살해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집념도 집요했기 때문이다. 그의 행방을 추적,끝없이 암살특공대를 파견했던 이스라엘은 특히 85년 튀니지로 거처를 옮긴 PLO본부에 기습폭격을 가해 73명을 사망케 했다. 그러나 아라파트는 때마침 산책을 나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더욱이 아라파트는 80년대말 아랍권의 결속와해와 이해대립으로 정치·군사적으로 최근 곤경에 빠졌으나 이스라엘 점령지역에서 「인티파타」(팔레스타인들의 봉기)가 불이 붙고 이에 대한 동정적인 국제여론이 조성돼 위기를 넘겼다.
물론 그의 능수능란한 「줄타기 외교」 능력도 정치적 입지를 지키는데 한몫했다. 보수아랍국가인 사우디와 공산맹주 구소련을 넘나들며 외교수완을 발휘,전세계 1백17개 국가들로부터 국가승인을 받아냈다. 하지만 걸프전에서 패전국 이라크를 지지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하는 바람에 한동안 외교적 곤경에 처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지난해 6월에는 남부 레바논에서 PLO거점을 상실하는 악재마저 겹쳐 아라파트는 PLO내 역학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약화된 상황이다.
아라파트는 그의 공적 업무 못지않게 사생활도 베일에 싸여있다. 지난 2월초 요르단강 서안지구 출신의 기독교인 젊은 여비서 수하 타월(28)양과 결혼한 사실이 알려졌을 뿐이다. 아라파트는 88년 프랑스 소르본대학에 유학중이던 타월양과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의 집중공격으로 때로는 아랍맹방들의 배신으로 한때 「재기불능」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끈질기게 정치생명을 이어왔던 아라파트이지만 이번 실종소동으로 그는 「사막의 불사조」라는 또 다른 별명을 얻을것 같다.<이상원기자>이상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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