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총선의 가장 깊은 뜻은 우리사회의 정치적 중심이 무너져 내리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단순한 리더십의 빈곤이 아니라 사회전체를 강타하고 있는 도덕성의 위기에 맞물려 헤게모니의 공백이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누가 이 빈 터를 차지할 것인가의 의문이 제기된다.흥미있게 잃은 논문 한 꼭지가 생각난다. 「한국 부르주아 계급의 헤게모니 탐색」. 하버드 대학에서 현대한국사를 강의하고 있는 에커트 교수가 2년전에 출간한 것이다. 결론은 신중하게 부정적인 것이었지만 시기는 다소 빠르지 않았나 싶다. 국민당=부르주아계급의 등식에는 아직 의문이 있지만 한국재벌의 총수가 직접 만든 재벌당의 정치무대가 활짝 열린 오늘날 이 주제는 보다 적실한 것이 아닐까. 금권정치를 우려하는 자세로 민주화의 행로를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이번 총선으로 일본식 정치모델,즉 선거는 열리되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없는 일당지배하의 민주주의 모델이 우리나라에 착근될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대만은 현재 이 모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가능성을 기대했던 관측통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풀뿌리의 강인한 활력이 지속되고 있음이 이번에도 입증되었다.
집권당은 벌써부터 대통령후보 경선을 시작한다고 하지만 차기권력 창출 과정의 암투가 앞으로 더욱 복잡,치열해질 것으로 가정할때 이것이 미칠 영향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스페인의 경험에서 보자면,프랑코 사후전환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스와레즈 총리의 「민주중앙당」이 계파간의 내분과 갈등으로 1982년 급격히 붕괴하면서 사회노동당이 집권,민주화를 신속히 진행시킨 역사적 선례가 있다.
시야를 좀더 넓게 잡으면 거대한 역사적 변혁과정에 있는 다른 대륙의 나라들,예컨대 러시아와 우리나라의 유사성도 관심을 끈다. 주제는 방대하지만 간략히 말해,강력한 개발 독재체제하에서 빠른 공업화가 일어난 것이 유사하고,도시화,사회분화,계층구조의 다원화,교육수준 향상 등에 힘입어 근대적 집단이 성장,시민사회의 중추를 형성하게 된 것도 비슷하다. 이들이 오늘날 구체제의 실질적 청산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근대화의 이면에서 부정부패가 넓게 확산됨에 따라 변혁의 도덕적 에너지가 유실되고 사회전반에 불신풍조가 높은 것 또한 놀랍게도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세대의 역할에 있다고 본다. 동구나 러시아에서도 세대차이는 있지만,특히 우리나에서는 70년대 중엽이래 건강한 민중문화로 길러진 젊은세대가 사회제도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멀지 않아 헤게모니의 변화를 예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밑으로부터의 대안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앞에서 국민당의 부상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헤게모니는 돈과 힘만으로는 이룩되지 않는다.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큰 비전,도덕적 설득력,다양한 세력의 열망을 응집시키는 철학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부르주아는 정치적 종속을 극복,자신의 헤게모니를 역사에 관철시킬 능력을 과연 가지고 있는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국민당의 계급적 근원이 너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있다면 오직 하나,자신의 근원을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것 뿐이다. 단순히 「현대」와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재벌의 「원죄」를 씻어내는 정치적 도덕적 재탄생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원죄」라는 표현은 너무 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우리 기업은 처음부터 일제권력에 깊숙이 유착된 상태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민족적 도덕적 위상을 키워 갈 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 「원죄」가 축복이 되어 기업성장의 비결이 되고만 데 있다. 일제때 습득한 「노하우」로 이들은 해방이후에도 독재권력에 아부하고 관료와 결탁,온갖 특혜·이권·지원을 받아 부를 축적하는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한국자본주의의 오래된 이 체질을 제거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 낡은 일본식 정경유착의 모델을 청산한다는 것을 뜻한다. 부정부패,정치비리,금권정치의 온상을 과감히 도려내는 것을 뜻한다. 기업을 준조세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 투명한 정치,깨끗한 정치,책임지는 정치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확실히 만드는 것을 뜻한다. 이를 통해 부르주아의 실추된 도덕성,신뢰,민족적 위상을 높여가는 것을 뜻한다.
이 개혁은 쉽지 않다. 일본과 대만도 이 점에서는 가망성이 없다. 막강한 금력을 가진 국민당으로서는 어쩌면 무장해제와 같은 발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주영씨는 정부와 기업의 관계에 널리 퍼진 비리와 부패의 고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공법을 사용하여 재벌 일반의 원죄를 씻어내는 도덕적 승부수를 먼저 던지고 나가지 않는다면 대중적 수준의 부르주아 헤게모니는 어렵다고 본다.
여기에 실패하면 시류에 영합하면서 일시적 성과는 거둘지 모르나 결국 불신과 환멸의 대상으로 전락,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 소멸해 버린 「반짝정당」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서울대교수·뉴욕 컬럼비아대에서>서울대교수·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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