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예속 언제까지…” 자구책 모색/변혁기마다 부정축재자 단죄 불만/민주당 정권서 경제인협의회 발족/5·16후 해체… 61년 전경련전신 「재건촉진회」 결성돈 안드는 정치란 정녕 없는 것인가. 4·19와 함께 부정축재자에 대한 단죄의 목소리가 들끓고 있는 가운데서도 정치권은 여전히 재계에 손을 내밀었다.
기업인들이 부정축재자로 몰린 상황에서 민주당은 7·27선거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부정축재자의 누명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던 재계 입장에서는 마다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1억5천만환의 정치자금을 거두어 민주당에 전했고 민주당은 이 선거에서 1백50여명이 당선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정권을 잡은 민주당 정부는 그러나 날로 도를 더해가는 사회혼란을 제대로 수습할 수 없었다. 전국적으로 데모가 끊일 날이 없었다. 미 대사관이 돌세례를 받았고 장면 총리의 집이 부서지기도 했다. 술취한 행인이 경찰관을 발로 차고 행패를 부려도 이를 강하게 제지하지 못했다. 시중에는 4월 위기설이 나돌았다.
무질서가 극에 달하자 장면 총리는 사회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자금을 기업인들에게 요청했다. 이른바 4월위기 극복자금이었다. 재계는 이번에도 1억5천5백만환을 거두어 전달했다.
이 자금을 전달한 것은 부정축재자로 몰렸던 기업인들이 자구책으로 결성한 한국경제협의회였다. 1961년 1월4일 회장 김연수(삼양사) 부회장 전택보(천우사) 이한원(대한제분)을 중심으로한 78명의 기업인들이 결성한 단체였다.
『4·19가 나자 자유당정권에 정치자금을 댄 기업인들은 부정축재자 처리법에 의해 모두 조사를 받게됐다. 그 당시 정치자금은 기업이 자원해서 내는 것이 아니라 사업상 융자를 할때 강제로 떼어버렸다. 본의 아니게 낸 돈이지만 그 결과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재계에서는 우리나라의 경제가 항상 정치의 예속물이 돼서야 쓰겠는가 하는 분위기가 돌았다. 본의 아니게 정치자금을 주어 부정축재자로 몰리는 누명을 벗기 위해서,또 경제가 정치의 시녀노릇을 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재계가 합심해서 이에 대항하는 기구를 만들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일본의 경제단체 연합회와 같이 재벌들이 힘을 합하자고 만든 것이 한국경제협의회였다』 송대순(당시 대한상의 회두),전택보,이한원,최태섭(한국유리),심상준(제동산업),김항복(평안섬유) 등과 함께 한국경제협의회 발기인으로 활동했던 경방의 명예회장 김용완의 말이다.
국민은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단죄를 요구했으나 이들 부정축재자를 처벌해야 할 정부는 기업인들에게 손을 벌렸고 기업인들은 이대로 당할수 없다면서 오히려 힘을 모아 단체를 만든 것이다. 기업인들이 정부를 우습게 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경제협의회는 정치권에 돈을 대주면서 부정축재자의 처리를 완화하도록 요구했다. 발목잡힌 정부는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장면 총리는 기업인들이 부정축재자의 범위를 대촉 축소시켜 내놓은 부정축재자 처리법 수정안을 앞장 서서 통과시켰다. 장총리는 민의원에 회부된 부정축재자 처리법 수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에 직접 나와 자기소속 국회의원을 모두 결속시켰던 것이다.
부정축재자들은 위기에서 헤어났다. 경제협의회는 한 술 더 떴다. 경제협의회는 부정축재 환수금의 처리를 현금으로 하지말고 정부가 지정하는 사업에 강제투자함으로써 벌과를 상쇄토록 하자고 요구했고 장면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른바 태백산 개발계획이었다.
부정축재자 처리문제가 이처럼 흐믈흐믈하는 동안에 5·16이 일어났다. 상황은 급변했다.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 6호로 경제협의회는 해체되고 대표적인 부정축재 기업인 15명은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기업인들은 다시금 부정축재문제로 단죄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혁명정부의 부저축재자 처리도 곧 한계를 드러냈다. 국민들이 선출한 합법정부를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전복시킨 혁명정부 수뇌들은 그들의 정통성 결여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경제면에서 성공을 거둘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부정축재 기업인들을 경제개발에 이용키로 했기 때문이었다.
부정축재자로 감옥에 갇혔던 기업인들은 43일만에 풀려나 곧바로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의 초청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박부의장은 『혁명은 끝났다. 앞으로 남은 것은 재건이다. 기업인들이 앞장서 경제재건에 나서달라』고 말했다. 부정축재자가 하루 아침에 경제재건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석방된 기업인 13명은 혁명정부의 요청에 따라 7월17일 이름도 걸맞는 경제재건촉진회를 발족시켰다. 이병철(삼성),이정림(대한양회),박흥식(화신),설경동(대한산업),정재호(삼호),이한원(대한제분),남궁련(극동해운),홍재선(금성방직),이양구(동양세멘트),최태섭(한국유리),김지태(조선견직),함창희(동립산업),조성철(중앙산업) 등이었다. 당초 회장에는 최태섭이 선출됐으나 본인의 고사로 회장에 이정림,부회장은 조성철이 맡았다.
경제재건촉진회는 시멘트,제철,비료,인견사,합성수지,전기기기,케이블,나일론공업 등의 건설계획안을 만들어 국가재건 최고회의에 건의했다. 경제재건촉진회는 또 부정축재환수금을 공장을 건설하여 현물로 납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제안들은 모두 받아들여졌고 이 땅의 경제는 모두 이들 경제재건촉진회 13명에 의해 주도되는 듯했다. 경제재건촉진회는 8월16일 임시총회를 열어 명칭을 한국경제인협회로 바꾸고 초대회장에 이병철,부회장에 조성철·남궁련을 각각 선출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그후 68년 17회 임시총회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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