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름」없는 선거… 「개발공약」에 놀아난다면…3·24 총선 첫번째 합동연설회장을 찾아 시골길을 달려간다. 아침안개 걷히는 들녘,햇볕에 노출된 논밭에서 땅심이 허연 입김을 분출하고 있다. 숨찬 생명력을 본다.
2·12 총선때 딱 한번 찾아갔던 어느 합동연설회가 생각났다. 까마득히 오랜 일 같은데,겨우 7년전이다.
「구름떼 같다」고 할 대군중이 그날 서울 도심의 국회의원 후보 합동연설회장에 몰려 들었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대단한 집결력이었다.
바람 찬 운동장을 메운 유세 청중은 아무도 서로 손잡지는 않았으나 무엇인가에 의해 뜨거운 무엇의 정체는 「목마름」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를테면 그 목마름은,숨겨진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본능적인 욕구,비판다운 비판이 없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권력의 도덕성이나 민주주의의 이상 같은 것,그런 가치와 덕목들을 향한 폭발적인 갈구였다고 할 수 있다. 군중은 그자리에 와서야 비로소 들을 수 있었던 「귀가 번쩍」하는 이야기들에 분노하고 열광했다. 그것이 「돌풍」과 「이변」을 예비한 생명력의 분출이었음을 그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였다.
결과를 예견하지 못했던 일은 2·12에 그친 것이 아니다. 그 3년뒤인 88년의 4·26 총선은 아무도 민심을 알아보지 못한 사이에 이른바 여소야대 구도를 만들어 냈다. 역시 「대이변」이었다. 정치를 하고 있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학자도 언론도 「대이변」이 났다고만 말했다. 예측을 못했던 것이다.
2·12로부터 7년,4·26으로부터 4년만에 되풀이 되는 3·24 총선은 과연 예견이 가능한가. 이번에도 또 무슨 「이변」이 있을 것인가. 역사는 정해진 곳,정해진 속도로 가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는 바보들이 괜한 민심 탓을 하는가.
90년대가 처음 맞이하는 총선의 첫 합동연설회장은 그런대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학교 운동장의 3면을 다 차지한 포장마차들도 너무 쓸쓸한 정도는 아니어서 오히려 분위기를 이룬다.
첫 연사로 나선 여당후보는 현역 의원. 그런데 호소가 색다르다.
『누가 돈을 주거든 받아 잡숫도록 하십시오. 그 돈은 여러분 것입니다. 여러분으로부터 도둑질한 돈이므로 받아도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표를 찍을때는 올바로 찍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학교앞에서 운동원들이 건네주던 선전물도 이 1번후보의 것이 가장 작고 초라했다는 점이 생각난다.
『우리당의 총재께서 우리 군내에 종업원 2만명을 고용하는 공장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청공장까지 들어서면 우리 군민 20만명에게 혜택이 돌아 갈 겁니다. 그뿐입니까,총재 그룹의 계열대학을 반드시 이곳에 유치하고 말겠습니다!』
어떤 신생 정당 후보의 열변이다. 그 역시 현역 의원.
세번째로 등단한 연사는 또 다른 신생 정당의 후보. 전직 외교관으로 「망명객」이었다는 이 후보는 중절모를 벗고 큰절을 하면서 『쓸개있는 사람을 뽑아달라』고 사자후를 토한다.
네번째는 제1야당 공천 후보이자 이른바 「범민주 후보」의 한 사람. 젊은 대학생 운동원들이 일제히 꽃술을 뿌리며 환호한다.
마지막으로 무소속 후보가 등단,실적과 공약을 호소력 있게 연설한다. 희한한 일은,유세청중의 10분의1도 이때까지 자리를 뜬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청중들은 끝까지 남아 열심히 박수를 쳤다. 그 중의 일부는 다시 운동장에 뿌려진 쓰레기를 주웠다.
후보들의 연설과 유세장 풍경은 그런대로 진지하다. 그러나 연설에는 「지역공약」만이 난무할 뿐 「천하대세」는 귀를 씻고 들어도 없다. 정책의 제시나 토론을 더더구나 찾기 힘들게 생겼다.
한 지방의회 의원을 붙들고 묻는다.
쟁점이 없습니까?
『시골 선거는 지역공약이 제일 먹힙니다』
40대 유권자 한사람에게 다시 묻는다.
찍을 사람 결정됐습니까?
『그럼요!』
기준이 뭔가요?
『인물됨됨이 올시다』
「민주 대 반민주」라고도 하던 지난 선거들의 구도는 이미 아닌지 오래이다. 유세장에 뜨거운 전류가 감응되지 않음은 그 탓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큰 공장 하나씩,큰대학 하나씩」과도 같은 엉터리 놀음에 더이상 놀아나는 총선이 만에 하나라도 된다면,바로 그같은 결과야말로 「망국적인 대이변」이 될 것이다.<편집이사·논설위원>편집이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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