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낸다” 공언에도 현실은 불가항력/일부 그룹 총수 도피성 해외 출장도재계와 금융계는 이번 총선에 얼마 만큼의 정치자금을 내놓아야 할까.
14대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재계 및 금융가에 정치자금 제공문제가 최대의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그 규모와 전달방법 등에 관해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 총선의 정치자금 제공문제는 역대 어느 선거때보다도 민감한 사안.정부나 재계가 올 연초부터 누누이 정치자금은 주지도 받지도 않겠다고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최고 당국자가 연두기자 회견에서 『기업인에게 선거자금을 강요하는 것은 엄단하겠다』고 천명했고 재계의 본산인 전경련의 유창순 회장도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전경련이 앞장서서 선거자금을 모금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정부·재계 공히 외형상으로는 선거자금을 거래하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충분히 다져온 셈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않아 재계와 개별 기업들이 고심하고 있다. 총선이 임박하면서 명분보다 현실의 실리적 판단이 앞서 정치자금 제공이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 선거때 언제 한번이라도 자금제공을 빠뜨린 적이 없고 이번에도 여기저기서 손을 벌리고 있다.
재계는 이와 관련,지난 2일 유 전경련회장을 비롯한 4대 그룹회장이 참석한 극비회동을 가졌다. 삼성 현대 대우 럭키 금성 등 4대그룹의 총수 또는 그 대리인이 참석한 이날 회동의 구체적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선거자금 제공문제가 주로 거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날 회동은 정치권으로부터 정치자금 제공문제를 검토해 달라는 요청이 와 재계의 중지를 모으기 위해 긴급히 마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는 이날 비밀회동에 이어 3일의 경제5단체장 회의 9일의 전경련회장단 회의 등을 통해 이 문제를 연거푸 논의했으나 의견이 상당히 엇갈려 구체적인 합의를 못 얻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최고 당국자가 정치자금을 안받겠다고 천명해 왔고,기업들도 지난해 경기악화로 인해 자금 여력이 최악의 상태인 마당에 재계가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이에 따라 궁여지책으로 내린 대강의 결론은 개별기업이 자율적으로 하되 지난해 광역선거 수준을 넘는 액수는 억제하자는 쪽으로 모아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모금·전달방법도 과거 방식에서 탈피,전경련 등 경제단체가 일괄적인 창구역할을 하지 말자고 의견을 모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서 재계가 제공할 정치자금은 지난해 광역선거때의 50억원을 넘어서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번의 경우 삼성 현대가 각각 7억5천만원,럭키금성 대우 선경이 각각 6억원,쌍용 1억5천만원,한국화약 롯데 한진이 각각 1억원씩을 갹출,30대 그룹이 모두 50억원을 모아 선관위에 비지정기탁 (특정 정당을 지정하지 않고 선관위에 일괄적으로 기탁하는 방식)했다.
이와 함께 은행,증권,보험,단자 등 금융권에서도 총선 정치자금 제공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금융계측은 『아직까지 자금제공 요청을 받은바 없다』고 밝히면서도 『요청이 오면 낼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역대 선거에서 재계와 금융계가 대개 동일한 수준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던 전례에 비춰볼 때 재계가 이번에 50억원을 낸다면 금융계도 50억원 가량이 될 공산이 크다.
이렇게 볼때 재계와 금융계가 이번 총선에서 부담해야 할 정치자금은 도합 1백억원 안팎이 될 것이라는 관계자들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이 액수는 실제로 개별기업이 부담하는 돈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개별기업들은 「재계공동」 「금융계공동」 차원에서 갹출해야하는 선거 기부금과는 별도로 더 큰 규모로,더욱 은밀하게 (선관위를 통하지 않고) 각 정당이나 개별 정치인들에 선거자금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대그룹의 경우 총선때 이렇게 해서 나가는 돈이 최소한 1백억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당이나 정치인들은 이번 총선에 기업들이 과거처럼 협조해 주지 않아 돈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기업인들에게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고 있고,기업은 경제사정이 안좋은데 옛날처럼 치레를 할 수 없다며 일부 그룹 총수들의 경우 도피성 해외출장을 연장하고 있다.<송태권기자>송태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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