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세력으로 부상한 한국」 이것은 카네기 윤리국제문제위원회가 지난 2월27일 뉴욕에서 열었던 패널토론의 주제다. 이 모임에 많은 전문가들이 모여 경제문제,남북관계 등을 진단했다. 특히 정치적 리더십의 문제,정치개혁의 부진에 관련된 문제들을 심도있게 다루었다.우리나라 민주화는 모양새로만 보면 그럴듯한 점이 많다. 자유화와 민주화가 비교적 빨리 진행된 사례로 꼽힌다. 이번 선거만 하더라도 그렇다. 민자당과 민주당외에 재벌,기층민중,새정치 등을 대변하는 정당들이 골고루 참여하고 있어 언뜻 보면 그야말로 모든 정치세력이 자유경쟁을 벌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실제는 매우 다르다. 정치무대는 열려있고 선거열풍은 불고 있지만 유권자는 냉담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국민의 정치불신과 환멸이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진단이 유력시된다. 이로부터 나오는 세가지 위기경향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정치가 소수 정치꾼의 이합집산일 뿐 국민은 소외되어 있다는 낭패감이다. 몇 사람의 보스가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는 정치에 국민은 염증을 느끼고 있다. 과두제와 독과점의 피해가 크다. 따라서 개명된 시민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정당이나 지도자가 없다. 대표성과 신뢰성의 위기는 오늘날 동구,러시아 등에서도 심각하다고 하나 어쩌면 우리가 더 심한지도 모른다.
둘째,가시적 변화가 있다고 하나 정치의 기본틀이 고루하다는 것이다. 6공은 인물의 교체를 부분적으로 가져왔지만 정치의 질을 높이지는 못했다. 국민당의 출현은 분명 하나의 사건이나 충격이지만 선거양상은 구태의연하다. 금권정치,인식공격,공약남발,과열,타락,향응,매수,지역감정이 판을 친다. 제도정치 전체의 도덕성 위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실질적 개혁의 부진이 큰 문제다. 민주제도가 정착되려면 정치인들 사이의 수평적 자유경쟁 못지않게 수직적 계파타협이 제도화되어 사회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통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사회위기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발전적으로 계승할 유산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앰스덴의 최신저술 「아시아의 다음②」은 이 점에서 암시적이나 그녀는 이책에서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관건을 값싼 양질의 노동력에서 찾지않고 국가의 기업가적 산업정책에서 찾았다. 풀어 말하자면,사회주의체제나 남미에서처럼 국가가 기업,노동자,농민에게 방대한 보조금을 나누어 주어 안정과 복지를 추구하는 것 대신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가 자본가와 노동자를 적극 육성 훈련시키면서 이들이 국가발전 목표에 따라오도록 채찍질하고 이점에서 성공적인 기업들에 자원과 혜택을 집중 투입시켰는데 이것이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국가의 기업가적 성격을 오늘날 어떻게 생산적 기능으로 재구성할 것인가는 분명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활동의 제도적 틀로 굳어진 「강성 권위주의」의 청산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예컨대 일본식의 「연성 권위주의」와도 구별된다. 「강성 권위주의」는 모든 집단이 국가권력에 수직적으로 편입되기를 요구한다. 「보스정치」 또는 「밀실정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도전은 허용되지 않는다.
역사적 경험에서 볼때 이런 권력구조는 어쩌면 우리가 추구해온 산업화의 필요악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외연적」 발전이 끝나고 내포적 발전단계에 접어들면 이것은 무너지지 않을 수 없다. 실패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성공함으로써 효력이 소진된다는 것이다.
국민당의 창당은 이 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국가권력의 비호하에 성장한 재벌의 정치적 독립가능성이 검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어떠할지는 더 두고 볼 일이지만 국가가 금융·재정·조세 같은 수단들로 기업을 통제하면서 당근과 채찍으로 재벌위에 군림했던 긴 권위주의의 시대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있다.
이러한 분석은 우리사회 정치위기가 근본적으로 제도권력과 사회권력의 불일치로부터 기인함을 보여준다. 아울러 제도정치의 전면개혁을 요구하는 근대화 압력이 시민사회에 가중되고 있음도 분명하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투표로 연결시키느냐에 있다. 여기에 많은 어려움과 혼란이 있다.
그러나 몇가지는 분명한것처럼 보인다. 3당합당 이래의 경험과 이치로 볼때 민자당이 이번 총선에서 압승한다면 개혁은 아마도 기대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들은 이제 안심하고 권력다툼에 전념할지도 모른다. 민주당이 호남에서 완승하는 것도 보기좋은 일이 아니다. 기업가,노동자,농민 등이 계층의 관점에서 최선의 정당을 찾는것도 바람직스럽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85년과 88년 총선에서 그랬던 것처럼 유권자들이 투표에 적극 참여하여 표로서 집권당에 경종을 울리고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다.<서울대 교수·뉴욕 컬럼비아대에서>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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