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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유착기업인들 “부정축재”단죄(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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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유착기업인들 “부정축재”단죄(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37)

입력
1992.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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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4·19파장/이병철·정재호·이정림·설경동등/탈세추징·벌과금 백96억환 처분/여론비해 처벌미약… 그나마 5.16으로 원점회귀『60년 5월2일 두번째로 열린 과도정부 국무회의는 경제사범과 악질 세무관리를 엄단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자유당 시절 권력을 배경삼아 부당하게 치부한 자들을 정부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라도 단호히 엄단해야 한다는 것은 4·19정신으로 미루어 당연한 제일 과제였다. 국민들은 정부가 이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주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부당하게 치부한 기업인의 범위였다. 온 경제계가 자유당의 입김에 놀아나고 있는 저간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 나라의 경제계를 모조리 훑어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중대한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4·19이후 과도정부의 재무부장관을 맡았던 윤호병의 회고다.

4·19의 직접적인 원인은 부정선거에 있었지만 그 저변에는 각 부문에 만연됐던 부패상이 깔려 있었다. 권력과 줄이 닿으면 못할 것이 없는 사회분위기였고 토지개량,수리사업등 농업부문에서도 갖가지 부정이 행해졌다. 6·25이후 민생고의 해결 수단이었던 미국의 원조는 불균형 성장을 가져왔고 그나마 50년대 말부터 서서히 줄어들어 경제가 날로 피폐해 갔다.

정권과 기업의 결탁은 특히 3·15선거를 앞두고 극에 달했다.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은 기업인을 매개로 한 정치자금의 파이프라인이었다. 위에서 일정한 기준도 없이 특정 기업인에게 거액의 대출지시가 내려오고 대출받은 기업인은 자금의 3∼4할을 정치인이나 정당에 바쳤다.

4·19직전 서울은행장을 맡고 있던 윤모씨의 고백이다. 『자본금은 10억환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한국은행에서 이러이러한 특정인에게만 대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세사람이 지명됐다. 회수능력을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이런 일이 비단 서울은행뿐이었겠는가』

『당시의 금융은 정권의 시녀노릇으로 몸을 망친꼴이었다. 물론 정권은 칼자루를 쥔 강자였고 금융은 미약한 존재였다는 변명을 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변명이 후세에 와서도 용납될 수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 금융계가 정치에 영합했다는 심판은 4·19가 내려준 셈이었다』 당시 상업은행 전무였던 민병도의 회고다.

권력과 결탁해서 몸을 불려 온 기업인들이 도마위에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윤호병의 회고처럼 처리대상의 범위가 문제였다. 더욱이 과도정부는 「혁명을 비혁명적인 방법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었다. 정부는 따라서 조세범 처벌법의 테두리안에서 부정축재자를 처리키로 방침을 정하고 정부가 칼을 뽑는 대신 기업인들이 6월1일부터 20일까지 탈세액을 자진 신고케 하는 절차를 택했다. 논란의 대상이 되는 기업인들에게는 탈세액을 자진신고토록 통고하고 55년 1월이후 5년동안의 탈세를 80%이상 정직하게 신고하면 벌과금도 면제해준다고 알렸다.

그러나 6월20일까지의 자진 신고기간에 신고해온 기업인은 9명에 불과했고 탈세액도 모두 36억8천2백만환에 불과했다. 이병철(삼성재벌 5개기업) 21억4천만환,정재호(삼호재벌 4개기업) 5억6천만환,김상홍(삼양사) 1억9천만환,설경동(대동제당) 1억2천만환,송영수(전주방직) 2억9천만환,백남일(태창방직) 3억1천만환,구인회(낙희화학) 3천만환,이정림(대한양회) 6백만환,조성철(중앙산업) 5백만환.

이같은 자진신고 결과는 심각한 반향을 낳았다. 삼양사등 자유당 치하에서 탄압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던 기업도 신고한데 비해 지탄의 대상이었던 많은 기업인들은 눈치만 슬슬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론은 빗발쳤고 검찰은 최소 6개재벌은 전 재산을 국고에 환원해야 한다는 방향이었다. 분위기의 심각성을 감지한 태창방직의 백남일과 동립산업의 함창희가 자신의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했으나 이미 빚더미위에 앉은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가급적 조사대상을 축소하려는 입장이었던 재무부조차 최소 18명의 재벌과 60여개사를 조사대상으로 올려 놓고 있었다.

결국 정부는 부정축재 조사대상 재벌에 건설업자를 모두 포함시킨 23개 업자 68개 기업체를 정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이병철의 13개 기업,정재호의 7개기업,이정림 9개 기업,설경동 5개 기업,구인회 4개 기업,이양구의 동양시멘트등 4개 기업,남궁련(극동해운 극동통상 한국정유 한국흄관),최태섭(한국유리 동화산업),함창희(동립산업),백남일(태창방직),김원전(고려제지),이경용(달성제사),최재형(무학주정),조성철(중앙산업),정주영(현대건설),조정구(삼부토건),김용산(극동건설),이용범(대동공업 극동연료),양춘선(흥아공작소),이석구(대림산업),김성곤(금성방직),현수덕(동신화학 은성산업),은사천(한국견직 해성산업).

7월말 탈세조사가 끝났으나 벌과금을 얼마로 할 것이냐를 놓고 재무부와 검찰의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과도정부는 탈세범의 조사만 끝내고 처리방법은 뒤이어 등장한 장면 정권에게 넘겨졌다. 장면 정권은 집권 일주일만인 8월31일 과도정부의 조사를 토대로 24명 46개 기업에 대해 벌과금과 추징금을 합해 모두 1백96억환의 통고처분을 했다. 납부기한은 일주일.

기한내 납부한 기업인은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민주당정부의 통고처분이 불공평하다는 반발까지 일었다. 민주당 정부도 일원화된 처리방침을 정하지 못했다. 마침내 민주당정부는 부정축재자 처리법을 제정키로 했다. 부정축재자 처리법은 수차례의 수정과 타협을 거쳐 61년 4월10일 최종 확정됐다. 5월3일 11명으로 된 부정축재자 처리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5월17일까지 2주일간을 자수기간으로 정했다.

그러나 자수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어난 5.16은 부정축재자 처리문제를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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