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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배경 설경동도 선두대열에(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이력서: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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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배경 설경동도 선두대열에(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이력서:36)

입력
1992.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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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판도 변화:하/대한방직등 5개사 소유 4위 랭크/이양구는 시멘트·제과사로 “우뚝”/면방업계 김성곤·김용완·김용주 등도 두각50년대말 삼성의 이병철과 삼호의 정재호,개풍 이정림의 뒤를 이어 급부상한 기업인은 대한산업의 설경동이다. 당시 그는 대한방직과 대한전선·대동제당·대동증권·원동흥업 등 5개 계열사를 거느려 계열사면에서 랭킹 4위를 달렸다. 열다섯살에 가난을 피해 쌀배달에 나섰던 설경동 소년이 30여년이 지난 50년대말엔 한국 최고의 갑부대열에 올라선 것이다.

설경동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면서 쌀을 팔아 돈이 모아지자 정어리잡이 배 3척으로 수산업을 시작했다. 해방 당시에는 어선 70척에 비행기로 고기를 탐지할 정도의 함경도 거부로 성장했다. 해방과 함께 공산군이 진주하자 어선 몇척과 함께 월남한 설경동은 대한산업 이라는 무역회사와 부동산 회사인 원동흥업을 만들어 재기에 나섰다. 6·25 이전까지 그가 수원에 설립한 성냥공장은 남한시장을 석권하기도 했다.

6·25와 함께 그의 재산은 다시 불길로 사라지고 말았으나 53년 재벌로의 터전이 된 대한방직을 인수해 근대적인 경영을 시작했다. 그의 방직업은 날로 커갔다. 54년에는 대한전선을 불하받았다.

그가 재벌대열로 올라설 수 있게 된 것은 자유당의 재정부장을 맡은 이후였다. 한때 자유당의 수 많은 정치자금은 설경동의 손을 통해 흘러들어 오고 나갔다. 그 역시 정권과의 결탁만이 재벌로 성장할 수 있는 길임을 터득한 것이다. 이같은 이력 때문에 4·19와 5·16을 거치면서 다른 재벌과 함께 부정축재자로 몰렸다.

역시 월남 기업인인 동양그룹의 이양구도 50년대말 내로라 하는 재벌중 하나였다. 단신 월남한 이양구는 설탕과 밀가루 장사를 시작했고 삼성의 이병철과 손을 잡으면서 서서히 부상했다. 이양구는 이병철이 수입한 설탕을 독점판매하면서 피란지 부산시장을 석권했고 이병철이 제일제당을 설립한 이후에는 두사람이 합작으로 한국정당을 만들었다. 이 회사는 제일제당이 만든 설탕을 판매하는 회사였다. 이양구는 53년 현재의 동양제과인 풍국제과를 인수하고 55년 제일실업이라는 무역회사를 차려 무역업에도 참여했다.

이양구가 본격 재벌대열에 올라서게 된 것은 56년 삼척시멘트를 인수하면서부터다. 이양구는 삼척시멘트를 인수한후 동양시멘트로 이름을 바꾸고 시멘트와 제과를 주축으로 4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게 됐다.

이밖에 금성방직의 김성곤,경방의 김용완,전방 김용주,풍한산업 김영구 등 면방업계 기업인들이 재계의 앞자리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오늘날 재벌의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부분 기업인들이 60년대 재벌전성기를 맞을 준비를 하고있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김철호가 기아산업을 설립해 삼천리호 자전거를 생산하면서 일본 혼다와 기술제휴를 맺고 자동차 사업을 준비중이었고 역시 일본에서 귀국한 이원만은 코오롱의 전신인 한국나이론을 설립하고 국내에 합섬시대를 열고있었다. 또한 금호의 박인천은 광주에서 불황에도 쓰러지지 않는 괴물기업 광주여객의 노선을 부산 대구 등지까지 넓혀나갔고 선경의 최종건은 봉황무늬를 수놓은 72인치짜리 광폭이불감과 나일론 다우다를 생산하면서 섬유재벌을 꿈꾸고 있었다.

한진의 조중훈은 인천을 본거지로 미군 수송용역을 독점하면서 운송재벌로의 길에 들어섰고 두산의 박두병도 조선맥주 민덕기와의 치열한 시장쟁탈 끝에 57년부터 주한미군에게 맥주를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주류 재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과는 달리 자유당과 밀착됐던 백낙승의 태창재벌은 4·19가 일어나기 얼마전 백낙승이 눈을 감으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로 돌아섰고 40년대 국내 재계를 주름잡던 화신의 박흥식이 당시 10대 재벌의 명단에서 빠지는 등 과거의 재벌들이 뒷전으로 물러앉기 시작했다.

당시 재계의 전면에서 뒷전으로 밀려나기는 삼양사의 김연수나 대한제분의 이한원 등도 마찬가지였다. 또 금광왕 최창학은 자유당 정권과 끝까지 친해지지 못한채 58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50년대말 재계의 판도 변화에는 지역적인 연고도 크게 작용했다. 해방 이후 국내 재계를 리드하고 있던 이북 출신 기업인들은 6·25와 더불어 영남 출신 기업인들에게 재계의 선두그룹 자리를 내주게 됐다. 이북 출신 기업인들이 폐허속에서 맨손으로 다시 시작한 반면 영남 기업인들은 연고지를 배경으로 전쟁중에 오히려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때문이었다.

영남 출신 기업인들은 또 정권의 변화와 외부의 힘을 적절히 이용할줄 아는 한국적인 경영에도 능했다. 미국의 원조가 소비재에 몰릴때 소비재 산업에 앞장서 뛰어들었으며 정권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미리 파악하고 이를 재산축적에 활용했다.

삼성의 이병철과 럭키의 구인회,삼호의 정재호,금성방직의 김성곤,코오롱의 이원만,한일합섬의 김한수,벽산의 김인득,전방의 김용주,태광의 이임용,방림방적의 서갑호…등.

이들 영남 출신 기업인들은 50년대에서 60년대를 거치면서 국내 재계를 리드해 나가기 시작했고 특히 5·16 이후 국내 재계지도는 영남권 일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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