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같이 짓밟힌 청춘 돌려달라”/귀향후엔 결혼도 못하고 미래없는 “삶”/“보상노린 것인가” 질문엔 분노·혼절【동경 AP=연합】 한일양국의 기독교단체들과 일본 야당의원들이 조직한 정신대 문제에 대한 심포지엄과 기자회견이 2일 동경에서 열려 2차대전중 정신대로 끌려갔던 심미자(69) 황금주씨(72) 등 두 한국여성들의 증언을 청취했다.
이 두명의 한국여인들은 이날 감동어린 증언을 통해 2차대전중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로 희생당한 그들의 경험을 차근차근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이들 두 여인중의 한 사람인 심미자씨는 두 사람이 얼마만큼의 보상을 원하느냐는 한 일본기자의 말에 소리를 크게 지르고는 곧 졸도하고 말았다.
그녀는 구급차에 실려 인근의 병원으로 보내졌다.
『내 나이 이제 69세이고 가진 것이라고는 일본군으로부터 받은 상처자국과 찢어진 내 감정 그리고 만신창이가된 내 자궁뿐』이라고 병원에서 돌아온 심 여인은 말을 이었다.
그녀는 이어 자신은 16세때 「종군위안부」로 일하기 위해 일본 남부의 후쿠오카에 강제로 보내져 일본군에게 성을 제공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심 여인은 그러나 『내가 여기 온 것은 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니 제발 나를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강조했다.
황금주씨는 모인 사람들에게 『당신들(일본사람들)은 나를 잡초같이 취급,짓밟고 다녔으나 우리는 이렇게 살아 남았다. 그러나 우리는 성의가 없는 피상적인 사과는 더이상 용서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나의 청춘을 돌려달라. 난 다른것은 바라지도 않는다』고 황 여인은 말했다. 그녀는 또 『나에게는 미래가 없다. 너무나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내 인생을 이렇게 끝낼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심 여인은 또 평일에는 하루 30명의 일본군을 상대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주말에는 거의 60명을 상대했다고 밝혔다.
종군위안부로 일한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심 여인도 이 고난의 세월동안 매독에 걸렸는데 쉴 여가도 받지 못했었다.
전쟁이 끝날후 그녀는 1953년까지 공장직공으로 일하다가 끝내는 서울에 돌아왔으나 결국 결혼하지 못하고 말았다.
심 여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아직 젊고 미래에 많은 꿈을 가진 나같은 처녀의 심정이 어떠했었는지 상상해 보라』고 울먹였다.
황 여인은 자신이 만주에 있는 종군위안부대로 보내졌다고 말하고 『나는 그때 몇몇 다른 처녀들과 함께 공장에 가는 것으로 얘기를 들었는데 어쩐지 이상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그녀는 이어 서울에 사는 자신의 이웃 시집안간 젊은 처녀들이 모두 일본경찰에 의해 끌려 간뒤 각각 다른 장소로 보내졌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다른 처녀들의 행방에 대해 아는바가 없다고 말했다.
종전후 황 여인은 기차를 타거나 걷기도 하며 두달만에 서울에 돌아왔으나 결코 친척들을 찾아보지 않았다고 밝혔다.
『너무 부끄러워서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난 그후 결코 결혼도 하지 않았으나 나도 결혼을 하고 싶고 가정을 갖고 싶었다』고 술회했다.
황 여인은 쓰라린 과거를 회상할 때 얼굴을 찡그리기도 하고 손으로 크게 휘젓기도 하며 증언했다.
그녀는 이어 자신이 일본군의 오럴섹스를 거절했을때 그 군인이 총을 자신의 다리사이에 집어넣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너무나 부끄러워서 최근까지만 해도 자신의 경험을 결코 말하지 못할 것으로 느꼈다고 밝혔다.
『하나 난 내 경험을 말하기로 결심했는데 왜냐하면 역사의 그러한 오점을 파헤치지 않고 놔둘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제네바의 유엔인권위원회에서 갓 돌아온 후쿠오카에 사는 최창화목사는 미야자와(궁택) 일본총리가 희생자들 앞에서 사과해야만 하며 『이것만이 이들 나이든 여인들이 바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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