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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주인서 「부의대명사」부상/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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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주인서 「부의대명사」부상/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33)

입력
1992.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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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병철 시대/제조·유통·금융 등 잇단 창업·인수/사업 20년만에 16개기업 총수군림/57년 첫 공채실시 사원모집 새시대 열기도우리나라의 재벌을 이야기 하면서 삼성과 창업자 이병철을 빼놓을 수 없다. 삼성의 역사는 곧 국내재벌의 성장사이다. 어느정권,어느사실에서도 삼성의 자리는 항상 앞이었으며 그때마다 화려한 이력으로 점철돼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돈많은 사람은 「돈병철」로 통했다. 단절과 굴절의 연속이었던 한국 현대사에서 수 많은 재벌들이 명멸했지만 삼성만큼은 한순간도 쉬지않고 재벌의 대명사로 자리해온 것이다.

삼성그룹과 창업자 이병철이 재계의 대명사로 부상한 것은 50년대중반 이후부터다. 무역업에서 번 돈을 제당과 모직 등 수입대체 산업으로 전환하면서 재벌로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이병철은 57년 시중은행의 주식 절반가량을 확보한 뒤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 학업을 집어치우고 사업에 투신한지 21년 만이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다니던 이병철이 동경유학을 청산하고 사업자금 3백석을 들고 기업의 길에 나선 것은 1936년.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방앗간을 돌렸고 쌀장사로 돈을 모으자 운수업과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다. 38년에는 대구시 수동에 2백평의 사무실을 마련하고 자본금 2만원의 삼성상회라는 무역회사 간판을 달았다. 삼성그룹의 출발이었다. 삼성상회는 만주 등지에 청과물을 수출했다. 돈이 모아지자 43년에는 조선양조를 인수하고 소주와 탁주는 물론 월계관 이라는 상표의 청주를 만들어 영남일대를 석권했다.

사업에 대한 이병철의 큰 꿈은 해방을 맞이하면서 구체화됐다. 서울로 사업의 터전을 옮긴 이병철은 고향선배인 조홍제와 현 영진약품 회장인 김성기 등과 함께 삼성물산 공사를 설립했다. 1948년 그의 나이 39세 때이다. 삼성물산은 마카오 무역과 홍콩 무역시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재계의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6·25 전쟁중 무역업자 이병철은 부산에 본거지를 두고 일본에 고철을 수출하고 설탕 의약품 등을 수입하면서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무역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이병철은 전쟁 복구기간동안 쏟아진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제일제당을 설립하고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1953년 8월이다. 그는 곧 소비재 산업에 치중했던 미국 원조당국의 의지에 맞게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제일모직은 마카오 신사를 이땅에서 몰아내고 국산품의 이미지를 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병철은 한국적 경영의 천재라는 칭호에 걸맞는 수완을 발휘했다. 이병철은 외부의 변화에 적당히 순응하고 힘의 진원지를 가급적 가까이 함으로써 사업영역을 넓혀 나가는데 남다른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미국의 원조배정에서 앞자리를 차지했으며 자유당의 각종 경제사건 와중에서도 삼성과 이병철은 피해자의 위치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50년대 재계의 판도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은행주 불하에서 이병철은 시중은행 주식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는 특혜의 대상이었다. 재벌의 3대요소인 생산 유통 금융을 고루 갖추고 경영의 다각화라는 명분아래 각종 기업을 설립,혹은 인수하면서 재계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초기의 경영다각화는 제일제당이 55년 12월 삼양물산의 이양구와 함께 설립한 대한정당 판매. 이 회사는 제일제당이 생산하는 설탕을 독점 판매했다. 이병철은 또 57년 효성물산과 58년 근영물산을 설립했다. 미국의 원조를 하나라도 더 따내기 위해 설립한 간판만 있는 가공회사였다. 시중은행의 대주주로 등장한 이후에는 여유있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부실기업들의 인수작업에 나섰다. 58년에는 은행부채로 허덕이던 한국타이어를 이양구와 함께 인수했다. 한국타이어는 강경옥이 경영하던 회사로 57년 ICA(국제협조처) 원조 35만달러를 들여 시설보수를 끝냈으나 과잉투자가 원인이 되어 부실해진 기업이었다. 이병철의 처음 지분은 33%였으나 이양구가 손을 떼면서 지분이 49.5%로 높아졌다. 또 이양구와 함께 삼척시멘트를 인수한 뒤 경영권을 이양구에게 넘겼다.

이병철은 57년에는 천일증권을 58년에는 동일방직과 호남비료공업,안국화재를 각각 인수함으로써 50년대 말에 이미 3개 시중은행을 포함,16개에 달하는 계열기업을 거느린 재계의 화려한 별로 자리잡았다.

기업의 규모가 이처럼 커지고 경영이 다각화 됨에 따라 그룹차원의 경영을 전담할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돼 59년 5월에는 이서구를 실장으로 한 핵심조직 삼성비서실이 발족됐다. 이에 앞서 이병철은 인재제일 이라는 경영이념 아래 민간기업으로는 국내 최초로 사원공채를 실시했다. 57년 1월이다. 당시 공채 1기로 삼성에 입사한후 비서실장과 삼성반도체통신,제일모직 사장 등을 두루 거친후 현재 한국화이마테크의 회장을 맡고있는 송세창은 『당시 대졸자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은행과 관공서 그리고 약간의 기업뿐 이었다. 삼성 공채광고를 보고 몰려든 학생들은 시험장인 서울상대를 가득메웠다. 27명이 최종 선발되어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교육을 얼마나 철저하게 받았는지 30년이 지난후 제일모직 사장을 맡아 대구공장에 들렀을때 기계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해 주위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이병철은 많은 인재를 길러냈고 그들은 오늘날 재계를 리드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현대적인 재벌인 이병철. 그는 엄격한 신상필벌과 차가운 경영스타일 등으로 주위의 적지않는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경제의 왜곡을 몰고왔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한국의 현대 경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출한 기업인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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