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차 남북고위급 회담을 취재하고 돌아와 「평양기행」을 연재하는 동안 나는 매일 갈등을 겪었다.분단 47년만에 보고싶던 형제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와 그들의 체제와 사는 방식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 괴로웠다.
내가 혹시 몸에밴 반공 교육탓에 무조건 그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닌가,70년·80년대에 겨우 경제발전을 이룬 「벼락부자 남한」의 교만함으로 그들을 얕본것은 아닌가,이질적인 문화에 감정적인 혐오감이 앞섰던 것은 아닌가… 나는 글을 쓰며 계속 나 자신을 점검했다.
2차·4차회담때 평양을 방문했던 기자들이 서울에 와서 쓴 기자들에 대해 그들은 격렬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만찬에서 만난 사람들은 으레 남한기자들이 썼던 기사를 화제에 올려 비난했고,『돌아가면 똑똑히 기사를 쓰시요』라며 똑바로 노려보는 사람도 있었다.
북측기자들과 안내원들은 『우리 현실을 왜곡하지 말고,통일에 도움이 되는 기사를 써달라』고 기회 있을때마다 부탁했다.
나흘동안 나를 돌봐준 안내원은 조평통에서 일한다는 48세의 여성이었다.
6·25때 폭격으로 부모를 잃고,학원(고아원)에서 자랐다는 그는 반미감정이 뿌리깊고,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이 자라던 함경도의 학원에까지 찾아와 전쟁고아들을 보살펴 주었던 「경애하는 김일성 수령」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3박4일이란 친구를 사귀기에 충분한 기간이었고,그와 나는 같은 또래의 여성이었고,무엇보다 그는 사려깊고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 닿을듯 닿을듯하며 끝내 닿지 못하는 마음속에서 체제의 벽을 느꼈으나,동시에 서로를 동년배의 동포로 따듯하게 기억했다.
그도 나에게 『통일에 도움이 되는 기사를 써달라』고 말했다. 북에서본 「진실」을 전하기위해 갈등속에 쓴 나의 기사가 나로서는 「통일에 기여하기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그가 이해해줄 날이 언젠가 오리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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