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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항에서 자랍니다/이기정 신부·서울대 교구 사목국장(종교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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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항에서 자랍니다/이기정 신부·서울대 교구 사목국장(종교인칼럼)

입력
1992.0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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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저는 열대어를 열심히 기른적이 있습니다. 굽비,블루구라미,네온 테트라,에인절,베타,수마트라,고리도라스 등 별의별 녀석들이 어항을 넓은 자기들의 세상으로 사는 것이 아름다운 그림책을 보듯 참 재미있었습니다. 물속의 향연은 언제나 펼쳐지고,형형색색의 고기들이 각본도 없이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이 실로 대자연의 순리적 연기와 같아 감탄이 절로 났습니다. 다양한 고기들의 율동,유연한 방향전환,수초와 돌과 그리고 고기들로 어우러진 소형 대자연,이 모든 것이 너무나 어울렸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어항의 세계를 감탄하면서 멍한 미소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마 그때 저는 나이가 무척 어렸나 봅니다.그 다음 얼마가 흐른 후에야 저는 고기들의 생태를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물고기라는 단어만으로 생각했던 것에서 열대어의 특성과 그 서식방법을 알게 되면서 고기들간에 종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차이를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종의 개념은 아예 존재형식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생태가 근본부터 다르므로 이는 육지의 동물들이 서로 다르듯 열대어들도 그렇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치 개와 닭을 동물이라며 한 울타리에 넣으면 곤란하듯 열대어들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서로 경계하고 싸우고 도망가고 죽이고 먹고,같은 종끼리도 큰 놈이 작은 놈을 먹어버리니 말입니다. 살기위해 투쟁하는 무서운 세상임을 알았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어항이 결코 평화롭지만은 않다고 보았습니다. 아마 그때 저는 철이 들기 시작했나 봅니다.

그 다음 얼마가 흐른 후 어항세계속으로 나의 마음을 좀 더 깊숙이 밀어넣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물고기들 한마리 한마리의 성격까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먹이를 물고 도망가서 구석에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먹는 놈,마구잡이로 먹이통 속에 들어가 휘저으며 진탕먹는 놈,먹이통 밑에 대기하고 있다가 흩어져 떨어지는 먹이를 재치있고 간편하게 먹는 놈,먹이를 물고 도망가서 먹으려는 놈을 쫓아가서 빼앗아 먹는 놈,하여튼 별의별 놈들이 다 있었습니다. 공포에 질린 놈,약은 놈,치사한 놈,게으른 놈 등 갖가지 성격들이었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어항속의 세계는 생명유지를 위해 살벌하게 살아가는 험한 세상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때 저는 꽤나 성장했나 봅니다.

그 다음 얼마가 흐른 후 어항세계속으로 나의 생명을 불어넣듯 어항과 함께 하나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돌밑에 숨어서 눈을 껌벅이는 불쌍한 녀석에게 용기내어 밖으로 나와 먹으라고 응원했고,먹이통을 독차지하고 먹지도 않으면서 다른 녀석들이 오면 쫓아버리는 고약한 놈을 야단도 치고,약한 녀석을 죽어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놈에게 그러지 말라고 타일러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험상궂게 구는 놈은 망속에 가두어 두기도 했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어항속의 세상을 저는 분주하게 다니면서 녀석들에게 사는 법을 얘기하며 교육하고 지휘하기에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었습니다. 아마 그때 저는 신앙이 무엇이고 봉사가 무엇인지 약간 깨달은 때였나 봅니다.

그 다음 얼마가 지난 후 너무나 알다보니 뭐가뭔지 모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기 때문에 모르겠다는 말을 해보는 깊은 앎은,모른다는 앎일 것 같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타이르고 가르치고 꾸짖으며 기른 고기가 알을 낳았습니다. 그 알을 잘 돌보며 부화를 시켰고 미세한 먹이를 주어 수천의 어린 것들을 길렀습니다. 얼마 안가서 벌써 죽는 놈,잘 크는 놈,영 먹지 못하는 놈,마른 놈,뚱뚱한 놈,작고 약한 녀석을 먹어 치우는 놈들이 있기에 그랬습니다. 내가 네 어미를 얼마나 교육했는지 아니? 그런데도 너희는 여전히 그 모양이냐! 고기들은 저를 이해 못했습니다. 저만 헛소리 한 셈이었습니다. 그중 한 고기가 날보고 참 괴상한 동굴(입)이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걸 보고 저 동굴속에 들어가면 먹을게 많을거라며 나를 향해 시선을 묶은 후 유리벽을 비벼대며 헤엄을 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어항속에 들어가 살 듯 있다보니 저도 작은 고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 그때 저는 나름대로 세상의 쓴맛 단맛을 본 경험많은 늙은이가 되어 지쳐있었나 봅니다.

그 다음 얼마후 저는 어항속에서 밖을 보게 되었습니다. 푸른 하늘로 이어지는 공간이라는 큰 어항이 제앞에 있었습니다. 그 큰 어항에는 헝겊가죽을 입은 동물,털가죽을 입은 동물 대체로 이런 두 종류의 동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가 작은 어항 밖에서 작은 어항을 들여다 보며 생각했던대로 큰 어항속에서 그 모양 그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두 어항을 살다보니 오락가락 몽롱해지며 외계에까지 갔다 온 기분이었습니다. 아마 그때 저는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던 나이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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