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뇌사라는 말이 별로 생소하지 않은 것 같다. 일전 뉴키즈 소동으로 죽은 여고생의 사망기사가 「뇌사상태에 빠진지 이틀만에 숨졌다」고 한것도 이를 말해준다. 적어도 취재기자들 식물상태와 뇌사상태를,뇌사와 심장사를 분간해서 기사를 쓴 것이다.그러나 일반독자들은 어떠했을까. 뇌사라는 말에는 비교적 익숙하다 하더라도 뇌사가 무엇이며,뇌사를 인정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어느정도 알고 그 기사를 읽었을까.
이 물음은,그 여고생의 「뇌사후 사망」을 계기 삼듯,여러 신문이 일제히 보도한 보사부의 뇌사인정 방침,이를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법제화한다는 계획을 제대로 수용할만한 바탕이,지금 우리 사회에 과연 형성돼 있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는 물음으로 통한다. 그것은 의학상식의 보급과는 다른 차원의 물음이다.
앞의 사망기사를 예로 해서 말한다면,뇌사를 인정할 경우,그 여고생은 이미 이틀전에 죽었다고 해야 한다. 인공 호흡기는 당연히 그 시점에서 떼어낸다. 안락사의 문제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조건만 갖추었다면,그 직후에 그 여학생의 심장을 장기 이식용으로 떼어내도 그만이다. 보사부와 대한의학협회의 생각대로 하면,오는 정기국회 이후에는 이런 일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여고생이 내 자식이라고 가정했을때,아무리 법이 바뀌었다고해도,그런 광경을 수긍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뇌사로 판정이 났다고 하더라도,아직 심장이 뛰고,체온이 남아있는 딸이 죽었다고 납득할 수 있을까.더구나 그 몸에 칼을 대는 것을 어떤 어버이가 용인할까. 오히려 많은 어버이는 그런 경우 뇌사판정은 오판이라며 대들것이 틀림없는 것 아닐까. 또 그런 오판이 없다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아무래도 죽음을 제3인칭으로만 생각하는 의료나 행정의 합리주의가 끼어 들기 어려운 영역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보사부나 대한의학협회의 뇌사입법 방침과 추진계획은,너무나 심각한 일을 너무나 안이하게,또 너무나 성급하게 판단한 결과라고 하지않을 수가 없다. 그 보다는 전문가들끼리의 생각을 모아,한두차례 여론조사와 공청회만 거치면 일이 다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지금까지의 뇌사논의 방식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해야 옳다.
그렇지 않아도 뇌사문제에는 많은 의구심이 따른다. 그중 으뜸은 역시 뇌사판정의 잘못이다. 뇌사인정을 주장하는 국내의 저명한 의사가 「오판은 절대로 있을수 없다」고 쓴 글을 읽으면 소름이 끼친다.
과연 생명을 다루는 의학에 「절대」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얼마 안되는 내 책장 신문스크랩중에도 뇌사판정을 받은 사람이 살아 났다는 기사가 몇건있다. 그 중 하나가 재작년 9월26일 미국 북캐롤라이나주 어떤 병원에서 뇌사판정을 받고,장기 적출을 위해서 수술실로 옮기던 32세 남자시체가 살아 있는 것으로 밝혀진 사건이다. 미국의 뇌사판정 기준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뇌사판정이었는데도 그랬다는 것이다. 예정대로 그 환자의 장기를 떼어 냈다면,틀림없는 살인이 되었을 것이다.
또 어떤 근거에서 하는말인지는 모르겠으나,뇌사상태가 되면 길어도 14일 이내에는 온몸이 죽는다는 투의 글이 종종 보인다.
그러나 일본의 오사카대팀은 뇌사체를 54일간 살려둔 공인기록을 갖고 있다. 실험은 54일만에 끝났으나 1년 이상 심장이 뛰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이런 경우의 뇌사체는 다시없는 생리실험재료가 될 수도 있다. 이를 해부하면 생체해부나 다름이 없다. 호르몬과 혈액을 계속 채취할 수도 있다. 이것을 대규모로하면 산업화도 가능하다. 이것은 나만의 엉뚱한 공상이 아니다. 78년에 나온 미국영화 「혼수」(Coma)는 그런 「뇌사체 혈액공장」을 보여준다. 분별없는 생사조작의 귀결은 이런것이 아닐까.
「뇌사체 혈액공장」이 아니라도,생사람의 일부인 장기가 돈으로 거래되고,그 콩팥값이 최고 몇천만원을 호가하며,큰 병원 근처에 이를 중개하는 조직이 있다는 말은 흔하다. 이렇게 생사람 장기에 값이 매겨질때,사람의 목숨 값은 얼마쯤이나 된다고 해야 할까. 뇌사를 인정하는 미국에서도 이식용 장기가 모자라고 이식수술 비용이 비싸서,가난한 사람은 장기 이식을 좀처럼 받을수가 없는 현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장기를 떼어내,돈 있는 사람을 살리는 꼴이되고,제3세계를 수출국으로 하는 국제간의 장기 무역이 성립되는 현실이 우리를 당혹케 한다.
이 어려움 앞에서 나 같은 비전문가는 두려움에 떨며 물음을 제기할 뿐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뇌사를 인정하니까. 일본에서도 그랬으니까 하는 투로 뇌사인정 문제를 다루어서는 아니된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뇌사인정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더 잘 아는 일이겠으나,미국은 지난 78년 의학·생물·윤리·신학·법학·사회학자 등을 모아,대통령 자문위원회를 만들고,공청회를 지방마다 여는 등 4년간의 엄청난 품과 비용을 들인 끝에 뇌사인정 입법을 권유했고,이에 따른 주법은 지금까지 50주중 33주에서 성립이 됐다.
이를 받듯 시작된 일본의 뇌사논의도 여러 곡절을 거쳐 85년에 일본정부의 뇌사인정 기준이 제시됐고,뒤미처 총리직속의 주사회를 구성해,몇해를 넘기며 이를 검토한 끝에 지난달 뇌사를 인정하는 방향의 결론을 냈다. 그나마 여기에는 뇌사인정 반대의 소수의견이 붙어있고,국회의 입법과정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이런줄을 알면서도 우리 정부와 전문가들은 미국이 이랬으니까,일본은 이러니까 한다. 미국이 「미국사람의 죽음」을,일본이 「일본사람의 죽음」을 그토록 심각하게 검토했다는 사실은 외면하고,「한국사람의 죽음」을 그로써 유추하려한다.
걱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삶과 죽음이란 심각한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고 성급하게 결론을 찾는 풍토다. 그런것이 한국적인 성품의 일단인지는 모르나,삶과 죽음의 문제마저 그렇게 넘길수야 없지 않은가.
그리고 슬픈 일이지만 「의술이 산술」이나 다름없는 이 땅의 의료불신,그런 풍토를 바로 잡을 의식도 능력도 없어 보이는 듯한 보건행정에 대한 불신도 말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공개적인 뇌사논의와 이에따른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할 것임을 생각하는 것이다.<상임고문·논설위원>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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