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치하 정부발주공사 “독식”/현대·극동건설·삼부토건등 5개사/공사액 10% 정치권에 커미션 제공/미군공사 독점 정주영 “보리로 잔디위장” 묘책도『당시 미8군 공사는 손가락질만 하면 다 내 것이었다』
현대그룹의 창업자 정주영이 회고록에서 밝힌 50년대 중반의 건설업계를 풍자한 한 대목이다. 공사만 따면 곧 돈방석에 앉던 50년대 건설시장에서 가장 화려하게 재계 전면에 부상한 정주영의 수주방식은 손가락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건설업은 수주가 곧 돈이 되는 노다지 산업이었고 그만큼 권력층과 닿은 줄이 판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건설시장의 2대 발주자는 정부와 주한 미군이었다. 민간발주공사는 보잘 것 없었고 미군공사가 가장 컸으며 미국의 원조자금을 재원으로 한 정부발주공사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50년대 건설업계는 현대건설과 대동공업(이용범),홍익건설(정일),대림산업(이재준),조흥토건(황의성),신양사(장세환),흥화공작소(양춘선),극동건설(김용산),대륙토건(김규삼),삼부토건(조정구) 등이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설업이 노다지산업으로 떠오르자 너도나도 건설업에 뛰어들어 50년대 중반에는 1천여개의 대소 건설업체가 난립했다.
심각한 수급불균형으로 업체간 과당경쟁이 초래됐고 덤핑입찰이나 사전담합 행위 등 각종 부조리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유명한 건설업계 5인조가 형성됐다. 대동공업을 필두로 조흥토건,극동건설,현대건설,삼부토건 등이었다. 큰 공사에 대해 실시된 지명입찰시 5개 회사 이상이면 지명입찰에 응할 수 있다는 조항을 악용해서 결성된 이들 5대 업체는 서로 담합해서 정부공사를 거의 독점했다. 이들 5인조는 당시 자유당 국회의원이자 대동공업 사장이었던 이용범의 발의로 만들어져 자유당을 등에 업었다고 해서 자유당 5인조로도 불렸다.
50년대 건설업계 5인조는 4·19혁명 이전까지 정부가 발주하는 대부분의 대형공사를 순번에 따라 도급 맡아 재계의 선두로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은 현대건설의 정주영.
1950년 1월 설립된 현대건설은 공사다운 공사 한건도 못해 본 채 6·25를 맞았다. 정주영은 그러나 피란지 부산에서 오히려 다른 건설업체들보다 먼저 기반을 닦는 행운을 잡았다. 회사간판 하나만 둘러메고 부산에 내려온 정주영은 수영비행장 공사를 수주하는 행운을 맞았다. 피란길을 동행한 동생 정인영이 미군 공병대의 통역장교로 취직하면서 미군의 공사를 도맡았던 것이다. 서울 수복후 미군의 각종 막사를 맡았고 아이젠하워 숙소를 건설하기도 했다.
정주영과 정인영 형제가 엮어내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미군을 놀라게 했다. 정주영이 전후 복구공사에서 손가락만으로 공사를 따내는 계기는 52년 12월 부산의 유엔군 묘지단장공사였다. 각국의 유엔사절들을 맞아야 하는 미8군 사령부는 묘지를 파랗게 단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엄동설한에 뚜렷한 묘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정주영은 그러나 이 공사를 맡았다. 파랗게만 단장하면 된다는 말에 보리밭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는 트럭을 동원해서 낙동강 연안의 보리밭을 유엔군 묘지로 옮겼다. 미군들은 그저 원더풀이었다. 주베일 항만공사 설비를 국내에서 제작한 뒤 바지선으로 끌고가 공사를 마치고 서산 앞바다 물막이 공사에 퇴역유조선을 들이댄 정주영의 엉뚱하고 기발한 착상은 일찍이 발휘됐던 것이다.
50년대 최대 공사발주처인 미군을 완전히 잡고있던 정주영이 전후 복구사업에서 가장 선두를 달린 것은 당연했다. 정부공사 발주가 본격화된 57년 이전에 현대건설은 이미 연간 공사도급액이 5억3천9백만환에 달했고 자본금을 기준으로 한 55년 재계순위 9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58년경 건설업계 5인조의 일원으로 각종 공사들을 독점했으니 현대건설은 순풍에 돛을 단 항해였다.
현대건설이 본격적으로 부상하는 계기는 57년 9월 한강인도교 공사를 수주하고 부터다. 당시 최대 정부공사였던 인도교 복구공사에는 내로라 하는 건설업체들이 모두 참여했다. 장관들까지 나서 특정업체에 주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치열한 경쟁에서 정주영은 응찰가격순위 2위였다. 『그러나 1위의 가격을 써낸 흥화공작소의 가격을 본 내무부장관이 흥화공작소는 입찰의사가 없는 것 같다면서 2위인 현대로 낙찰했다. 이 공사에서 40%의 이익을 거두었고 건설 5인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정주영의 주장이다. 흥화제작소는 시내에서 한강까지 택시요금이 4천원 할 당시에 한강 인도교공사를 단돈 1천원에 응찰하면서 기부공사를 하겠다고 나섰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내무장관이 이를 거절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건설업계의 화제가 되고 있으며 당시에는 현대가 엄청난 줄을 잡고 있다는 말들이 동종업계를 중심으로 나돌았다. 극동건설과 삼환기업 삼부토건도 건설업계 5인조의 일원으로 50년대말 각종 공사를 따내면서 재벌로의 길을 달렸다. 삼부토건은 국내 건설업면허 1호로 도로 항만 등 각종 토목공사에 주력했고 삼환기업은 광장시장·메리놀수녀병원·문경시멘트공장 등 건축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50년대 이들 기업이 10% 내외의 공공연한 커미션을 내면서 정부발주공사를 독점하고 있을 즈음 대림산업의 이재준은 정부공사 대신 개인공사에 치중하면서 착실한 기반을 다져 나갔다.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형님 이재형이 족청계라는 이유로 자유당의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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