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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기행」들을 읽으며/정달영(화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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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기행」들을 읽으며/정달영(화요칼럼)

입력
1992.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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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신문에서 「평양기행」들을 읽는다. 고위급회담 취재기자들이 3박4일간 평양을 다녀와서 쓰는 보고서이다. 한결같이 재미 있어서 읽는다기 보다는 읽어야만 하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어서 이것저것을 다 찾아 읽는다.우리 기자들의 이런 「평양기행」은 1972년 8월 평양서 처음으로 열린 남북적십자 회담때에 비롯된 것이다. 20년전 일이다.

○“변한것이 없다”

그때 우리 대표단의 평양도착 뉴스를 보도한 한국일보의 1면이 광고없이 제작됐을 정도로 온 국민의 흥분은 대단했다. 4박5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한국일보에 싣기 시작한 당시 평양취재 제1호 기자의 연재 리포트 제목은 「북한 102시간 이상체험」이었다.

평양취재의 기회는 그후로 끊겼다,이었다,단속을 거듭했고 이어졌을때마다 기자들의 「평양기행」들은 대량생산 되었다. 기자들의 체험을 통해 평양을 추체험하려는 우리 사회의 수요가 그만큼 많은 탓일 것이다.

20년의 연륜을 헤아리는 「평양기행」들은 그러나 그동안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싶게도 생김새가 비슷하다는데 놀라게 된다. 갈때마다 바뀐 기자들 개인의 관점과 시각의 차이가 없는게 아니지만,그들 모두가 경험하는 북한인식의 충격과 감정의 추이는 너무나 같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최초로 겪는 체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체제와 문화를 목격하는데서 오는 「충격」이다. 정말 이럴수가 있을까. 깊이모를 「절망감」이 그 다음에 찾아온다. 분노와 고통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면 비로소 「연민」을 느낀다. 이럴수도 있을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내가 가진 잣대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지. 그리하여 뒤늦게나마 실낱 같은 「가능성」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70년대의 평양취재 기자들과 80년대의 기자,그리고 90년대의 기자들이 잠깐씩 목격한 평양은 여전히,그리고 한결같이 「이상체험」의 세계이다. 근본이 그대로이다. 우리 기자들의 생각이 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평양에 변한것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교황과 대통령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24일자는 교황과 미국 대통령이 폴란드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서 「공모」하고 「공작」한 전말을 커버스토리로 소개하고 있다. 흥미진진한 특종기사이다. 폴란드는 물론이고 동구와 옛 소련 땅에서 사회주의가 완전 몰락한 역사의 대전환에 현대판 「신성동맹」이 결정적인 몫을 했다는 사실은 추리극적인 상상을 넘어서는 놀라운 일이다.

타임은 지난 연말 1991년을 결산하는 특집호의 표지로 마리아상 그림을 넣어 독자를 의아스럽게 한일이 있다. 지구상에서 이념의 대립과 장벽이 해소된 엄청난 변혁의 해를 보내면서 세계적인 시사주간지가 얼른 보기에 엉뚱한 인물을 커버스트리로 선택한 것이다. 도대체 웬 성모상인가.

특집기사는 편집의도를 밝히는 대신 이른바 「파티마 발현」을 간접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조심스럽게 속셈을 드러냈다.

1917년 포르투갈의 한 시골 산중에서 어린이를 앞에 나타난 사건을 통해 성모마리아는 러시아인의 회심을 위한 메시지를 남겼다고 전해온다. 사회주의 종주국의 몰락이 이때 이미 예시되었던 셈이다.

교황 요한바오로2세와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처음 만나 폴란드 자유화와 「공산주의 제국의 붕괴」 전략에 대해 의구투합한 날은 1982년 6월7일이었다고 타임은 전하고 있다. 두사람은 이때 모두 암살기도에서 총탄을 맞고 살아난 뒤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히 교황은 피격1주년 되던날인 5월13일을 기해 포르투갈을 첫 방문하고 파티마를 찾아 감사기도를 드리고 돌아온 직후였다.

5월13일은 그가 피격된 날이기도하지만 파티마에 마리아가 처음 발현한 기념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소련의 몰락과 동구권의 자유화가 마리아의 파티마 메시지와 어떻게 구체적으로 연결되는지 추론할 길은 없다. 그러나 폴란드 자유화를 위한 교황과 대통령의 「공모」는 타임지 보도만으로도 설득력이 있다.

○백지화 대신에…

평양에서 정 총리 일행을 만난 김일성주석은 냅다 음식 타령만을 늘어놓았는가 했더니,정 총리와의 별도 면담에서는 『과거는 백지화하고 단결하자』고 강조하더라고 한다. 두번 세번을 읽어도 이 부분은 명치끝에 걸린다.

『천도교 예수교 기독교 유교 마르크스주의에 상관없이』가 「과거 백지화」 주장의 수식어인 점이 수상하다.

장차 죽음을 앞에둔 사람의 말은 착하게 마련이라고 하지만,나이 80고비를 넘기는 노인의 말이라 하더라도 그의 「과거 백지화」론은 그리 착한말 같지 않다. 그렇게 말하기 전에 스스로 해야할 일이 너무 많겠기 때문이다.

김일성주석은 지금 어려서 예배당 다니던 생각이 나는 것인지 모른다. 봉수교회,장충성당에 이어 그의 유년의 기억인 칠골교회가 재건되고 있는 것을 보아서 그렇다는 추측이 있다.

그러나 주석과 그의 아들이 폭력혁명 노선을 버렸거나 회심을 기대할 수 있겠다는 조짐은 평양의 아무데도 없다. 아무래도 주석은 자신의 죽음에 잔뜩 겁먹고 있음이 분명하다.<편집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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