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훈 미군물자 수송 운송재벌 발판/미군 고위층부인 고장차 수리 계기/최성모·전중윤등 식품업자도 재미/납품땐 앉아서 “돈방석”… 이권싸고 잡음도 많아1955년 여름. 서울과 인천간 국도를 달리던 한진상사 조중훈은 부평 근처에서 애타게 도움을 청하는 세단차 하나를 발견하고 차를 멈췄다. 그는 고장난 차의 밑에 들어가 이것 저것 원인을 찾아봤다. 고장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으나 엔진부위 고장인 것 같았다. 엔진 전문가인 그는 엔진의 나사들을 조이고 밸브를 조정했다. 온몸은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됐다. 드디어 시동이 걸렸다.
이 고장난 차에는 미군 고위층의 부인이 타고 있었다. 미군부인은 조중훈의 도움을 무척 고마워했고 후에 자신의 남편을 소개했다. 한진상사가 국내 최대 운송그룹으로 발전하게 되는 첫 인연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인천에서 트럭 한대로 다시 운수업을 시작했던 조중훈은 이날의 인연을 계기로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권을 따냈다. 전쟁전 한진상사 간판을 내걸고 운송업에 뛰어든지 11년만인 1956년 11월의 일이다. 군수물자 수송계약의 규모는 7만달러,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는 한국인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로 생각하던 미군들에게 신용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했다. 『창고에 보관중인 군복 1천2백벌,3만달러어치를 도난당한 적이 있었다. 즉각 남대문시장 등지에서 비상사채를 긴급 조달해 이를 변상했다. 군복을 도난당하고 금전적인 손해를 본 대신에 그들로부터 무형의 재산인 신용을 얻었던 것이다』 조중훈의 회고다.
그는 많은 미국인 장교들과 사귀었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장병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이때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동생 조중건은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조중훈의 한쪽 날개가 돼주었다. 조중훈이 당시 집으로 초대한 미군은 연인원으로 5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중훈은 『미국인들은 돈이 없으면 신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업을 위해서는 백만장자처럼 행세하며 그들을 압도할 필요가 있었다. 나의 여름별장에 초대된 미군장병들은 곧 한진의 신용을 믿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그의 미군용역 금액은 57년 10만달러,58년 30만달러,59년 1백만달러,그리고 60년에는 무려 2백28만달러에 달했다. 그의 미군 친구들은 또 후일 한진이 월남진출에도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군납이 한진그룹에 국내 최대의 운송재벌로 성장하는 터를 제공했던 것이다.
6·25동란 이후 군납은 크게 인기를 끌었다. 협소한 국내시장에서 군납은 최대 고객이었다. 따라서 군납시장은 노다지광맥으로 통했고 너도나도 군납에 열을 올렸다. 식품,타이어,피혁,페인트,비누산업 등은 군납을 바탕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이 틈에 적지않은 기업들이 기업확장에 나섰다. 면내의,모포,양말 등을 생산하는 상당수의 섬유 피복업체들이 군납덕을 톡톡히 봤고 최성모(세기상사),심상준(한금장유),전중윤(삼양식품) 등 식품업자들도 재미를 봤다. 이밖에 흥아타이어,한국타이어와 진해화학,대한잉크페인트 등도 군납대열에 끼어 터를 잡아 나갔다.
당시 호양산업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얼음을 군납했던 개풍의 이정림은 『1·4후퇴후 부산에서 개풍상사를 경영하면서 가만히 보니 미군들이 모든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하는데 심지어 얼음까지도 갖다 쓰고 있었다. 그래서 서울에 올라가 제빙공장을 한번 해볼 계획을 세웠다. 그때 미국에서 장사하고 있던 이원순씨에게 주문을 해 일산 1백톤짜리 제빙기계를 사들여 53년 8월 환도직후 제빙공장을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공장을 원효로1가에 세우고 미군 위생관의 물검사 등을 거쳐 1년에 25만달러어치 이상의 얼음을 납품했다.
당시의 군납은 노다지 광맥으로 통했던 만큼 이권화되어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군납을 둘러싼 비위사건중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던 것은 58년의 탈모비누 사건이었다. 인단비누와 지구유지가 연루된 탈모비누 사건은 수뢰사건으로까지 번져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당시 군납은 워낙 말썽이 많아 양식있는 기업인들은 군납을 멀리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시 군납으로 돈벌어 재벌이 된 몇몇 기업인들에 대해서는 당시의 행적을 둘러싼 구설이 아직도 오르내리고 있다.
군납으로 적지않은 기업인들이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지만 뭐니뭐니해도 당시 군납으로 가장 큰 기틀을 마련한 것은 건설업이었다. 오늘날 내로라하는 재벌중 건설업을 주축으로 하고있는 현대,대림 등도 당시 군납으로 재계의 전면에 부상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이들 건설업자들은 정치권과도 밀착,당시 자유당 5인조라는 말까지 나돌았었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