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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전을 읽는다/김창열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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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전을 읽는다/김창열칼럼(토요세평)

입력
1992.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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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전 2월25일을 읽는다. 다시 2월25일을 앞둔 오늘이 답답한 때문이다. 그 날에 시작된 노태우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1년은 또 어떨지가 궁금한 탓이다.신문철을 펴면,시간이 어김 없음을 실감한다. 그 해 이맘때도 캘거리의 겨울 올림픽이 화려했다. 24일자 신문은 쇼트트랙(시범종목) 김기훈선수의 금메달 소식을 전하고 있다. 바로 그가 어제(21일) 알베르빌에서 금메달을 땄다.

4년전 2월25일을 그 때 그 모양으로 있게 했던 양김도 다시 만나고 있다. 그것이 24일자 신문의 1면 톱이다. 만남의 주제는 국민여망인 야당통합이 아니라,두어달 앞의 총선전략이다. 결과적으로 이 때 양김의 소선거구제 합의가 여소야대의 6공초기 정국을 결정했고,그 「황금분할」은 2년뒤 3당합당으로 깨어졌다. 그리하여 지금은 여·야로 갈라선 양김의 숙명적인 패자부활전,그를 위한 사전선거운동이 한창이다. 그 열기가 앞으로 1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

더욱 눈을 끄는 것은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다. 기사는 노 대통령의 지지도가 78%에 이른다는 민정당의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하고 있다. 청와대 앞길을 산책로로 개방한다는 등의 가십기사도 눈에 띈다. 지금 읽어서는,정말 그랬던가 싶을 뿐이다.

그해 2월24일 청와대 7년을 마감하면서,전두환대통령은 대임을 마치고 「역사속으로 떠나는 지금」의 심경을 토로했다.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서야 할 시간』 『역사의 구속에서 풀려나는 시간』 『소박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간』 등의 수사가 줄을선 이임사였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역사속으로 떠나 보내지를 않았다. 소박한 일상으로 돌려 보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5공 청산이라는 역사의 무대에 다시 올라서야 했다. 아무래도 그는 역사의 의미를 잘못 읽었던 것 같다. 어떤 권력장치나,후계구도만으로는,대통령의 퇴임후를 보장할 수 없다는 교훈이 여기 있다.

다음날 새 대통령의 취임식은 이른바 노태우 스타일로 가득했다. 그는 『우리는 할수 있습니다. 해야 합니다』 이런 의기찬 말로,새 시대의 개막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취임사 말미의 한 대목이 마음에 걸렸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는 『국민을 일방적으로 이끄는 대통령』도 『이끌려 다니는 대통령』도 되지 않을 것임을 다짐했다. 무슨 뜻인가,그렇다면 대통령의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여하튼 그 말대로,우리는 이끌지도,이끌리지도 않은 걸음으로,여기 이 시점까지 왔다. 정치·경제·사회를 둘러보아,흡족한 구석은 별로 없다. 4년전 의기는 간곳 없고,달라진 그의 스타일만 남은 꼴이다.

그의 취임사에서 마음에 걸렸던 대목은 또 있다. 과거는 「반성의 거울」이로되 「족쇄」일 수는 없다고 한 말이다. 일반론으로서는 어떨지 몰라도,과거의 한 당사자인 그가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가,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6공 4년간의 역사는 새 대통령의 그런 인식이 잘못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런 안이한 생각이 여소야대 13대총선의 실패를 불렀다. 5공 청문회는 과거가 6공의 족쇄임을 증명하고 있다. 뿐인가. 몇10,몇백억원의 이웃돕기 성금을 대통령이 받는 「관례」도 과거의 족쇄요,TK인맥도 족쇄로 작용한다. 퇴임후를 착각했던 전임대통령의 행적 역시 족쇄나 같다. 그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심려가 대통령의 행보를 제약한다.

이런 족쇄가 6공의 진을 뺐다. 그 의기를 꺾었다. 남을 것은 혼란이요,인내라는 이름의 수동적 대응뿐이다.

그런 뜻에서,6공 새 대통령은 처음부터 레임덕(lame duck),「절름발이 오리」였다고 할수가 있다. 그 형국이 지나치면 시팅덕(sitting duck),「앉은뱅이 오리」가 된다. 임기말,힘 없는 대통령을 레임덕이라 부르는 미국사람들의 말투를 빌리면,시팅덕은 누구라도 총을 쏘아 잡을 수가 있다. 적어도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재벌총수 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말하기는 안됐지만,이런 것이 4번째 2월25일을 앞둔 오늘이다. 새삼 읽어본 4년전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아직도 노 대통령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마라톤으로 비유한다면,마지막 스퍼트의 기회가 남아 있다. 그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다 마른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를 쳐다본다. 새로운 결단을 촉구한다.

그 결단이란 별것이 아니다. 오직 6·29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때 인용했던 백범선생 말씀대로,벼랑에서 손을 놓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과거의 족쇄,퇴임후의 족쇄를 다 벗어버리는 것이다.

이 뒤 당장의 과제는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눈앞의 총선을 공정하게 관리하는 것이다. 그 여파로부터 나라와 경제를 지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이번 총선은 대통령의 남은 임기 1년을 좌우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총선의 승패가 아니라,그 공명여부다. 대통령이 거듭 공언해온 공명약속을 끝까지 지키고,그 결과를 변칙없이 수용하는 것,그리하여 6공의 정통성을 드높이는 것이 진정 대통령으로서 총선을 이기는 길이다. 그런 정통성에 의지하여서만,남은 1년의 누수를 막을 수가 있고 떳떳하게 권력을 물려줄 수가 있다. 이야말로 반레임덕의 묘수다. 이에 비하면 요즈음 대통령의 부산한 지방나들이 따위는 하지수나 같다.

앞으로 다시 4년쯤 지나서,그 때의 4년전 ­노 대통령의 마지막 1년을 읽는다면 어떨까. 나는 그 기록이 이런 내용이었으면 한다.

『그에게는 스타일이 있었다. 임기중 혼란이 있었으나 그의 수동적 스타일은 오히려 민주화에 보탬이 됐다. 비용이 들기는 했으나,민주화의 수지는 맞은 셈이다. 과도기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평점에 인색할 까닭이 없다』

과연 이런 기록이 가능할지,그 결판을 위해서도 새달 총선과정은 주목거리가 아닐 수 없다.<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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