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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호속 성장 자립정신 허약(조기유학 이대로 좋은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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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호속 성장 자립정신 허약(조기유학 이대로 좋은가:5)

입력
1992.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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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사·세탁등 기본생활 적응못해/음식투정까지… 친인척들 “아연”/섭섭히 대하면 고국 부모에 고자질도6개월전 LA에온 B모군(18)은 의사인 삼촌집에서 학교에 다닌다. B군이 오고부터 삼촌부부 사이는 금이 가기 시작해 최근엔 허구한날 싸움을 한다.

고급 티셔츠를 20여장이나 갖고 와 놀라게 했던 B군은 온지 며칠이 지나 빨랫감을 숙모에게 내놓았다. 이곳 아이들과 달리 자동세탁기도 만질 줄 모르는 조카가 내심 못마땅했지만 숙모는 아직 미국생활을 잘 모르는 탓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B군은 깨끗하게 세탁해준 티셔츠를 입지 않았다. 숙모는 도무지 영문을 몰랐다가 1개월뒤 아들을 찾아온 시아주버니로부터 『우리집 애는 티셔츠를 다려주지 않으면 안 입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실색을 하고 말았다.

부부가 교민들의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온 어느날 이 조카는 『아직 아무것도 안먹었어요』라며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생활 10여년 동안 부부가 함께 바쁘게 일하고 아이들 스스로 빨래나 식사를 챙기는 생활에 익숙한 부부에게는 참으로 난처한 존재였다.

그래도 삼촌은 참을 수 있었지만 시집식구라는 것만도 부담스러운 판에 볼일을 보거나 모임을 갖다말고 조카를 위해 집에 돌아와야 하는 숙모는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부부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숙사를 보내도 못미덥고 혼자 자취나 하숙을 시키는 것은 무척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들은 미국에 이민간 형제·친척이나 친구들을 든든한 보호자로 믿고 아이들을 맡긴다.

그러나 많은 교포들은 『부부가 하루 10여시간 일해야 겨우 살아갈 수 있는 미국생활에서 내 자식 건사하기도 힘든데 친척아이까지 맡는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라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더욱이 대부분의 아이들이 워낙 고이 자란 탓에 돌보기가 무척 까다롭다. 교포 황모씨(49)는 『한국에서 온 아이들은 이곳 교포들의 기본생활을 깰 정도로 적응을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뉴욕에 있는 J모군(16)은 고모집에 머물지만 늘상 음식투정을 해 속을 썩이고 있다. 아직 운동화끈도 혼자 못매는 J군은 사다먹는 고모집의 김치가 입에 안맞는다는둥 늘 음식 까탈을 부린다. 사촌들은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스스로 씻어 놓는데 J군은 싱크대에 옮겨놓지도 않고 자리를 떠 눈총을 받는다.

어떤 학생들은 친척들이 조금만 섭섭하게 해도 한국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고자질까지 한다. 교포들은 『한국 아이들이 물질적으로 풍요하게만 성장한 탓인지 자립·독립 정신은 약하면서 세상 물정은 너무나 잘안다』고 비판하고 있다.

한국유학생들은 학교에서 교포학생들과 거의 어울리지 않지만 친척 아이들과도 쉽게 동화되지 못한다. 유학생들은 영어만 쓰고 미국학생들과 어울리는 교포학생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C모군(17)은 『교포아이들은 한국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것 같아 꺼려진다』며 『어떤 사립고교에서는 유학생들이 교포학생을 영어만 사용한다고 때려 큰 말썽이 된적도 있다』고 말했다. 반대로 교포학생들은 한국유학생들이 돈을 너무 많이 쓴다고 지적한다. LAS고교의 L모양(17)은 『유학생친구가 쓸데 없이 쇼핑가서 선물사주고 밥도 사준다. 처음엔 사이가 좋았으나 갈수록 거리가 생긴다』며 『한국학생들이 돈좀 쓴다고 우리를 깔보는 것 같다』고 털어 놓았다.

조카를 「모시고」있는 뉴욕교포 L모씨는 『조카가 우리아이들보다 미국의 비싼 차 등 물건이름을 더 잘안다』며 『기껏 운동화 이름이나 아는 이곳 아이들과는 수준차가 나 대화가 안된다』고 걱정했다.

의타심에 젖어 손끝하나 까딱 할줄 모르거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마구 용돈을 써 교포가정에 갈등을 심는 아이들도 문제지만 친척에 대한 기대가 지나쳐 원망을 일삼는 국내의 부모도 문제다.

2년전 H모씨(42·여)는 고1,중3된 아들 둘을 데리고 LA에 왔다. 오래전에 이민,오빠와 사는 친정 어머니의 초청으로 자신은 영주권을 받고 아이들을 유학시킬 참이었다.

미국이 처음인 H씨는 아이들의 학교문제에서부터 교통편까지 모든 것을 오빠식구에게 의존했다. 그러나 리쿼스토어(잡화점)를 하는 오빠와 간호사인 올케는 생활이 바빠 제대로 도와줄 수가 없었다. H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오빠에게 대들다가 아이들을 끌어안고 울거나 방안에 틀어박히기 일쑤였다. 미국에서 태어나 친척개념이 희박한 오빠의 두 딸에게는 할머니와 고모,어머니와 고모의 갈등은 큰 충격이었다. 큰딸(19)은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결국 5개월만에 아파트를 얻어 나간 H씨는 그뒤 오빠집을 찾지 않는다.

최근 LA 등지의 교포들은 모이기만 하면 『또 한국아이가 왔다』는 얘기를 주고 받는다. 그 말은 『골치가 아프다』는 말로 이어진다. 심지어 한 교포는 『교포들의 수난시대』라고까지 표현했다.

이민온지 10년 가량된 W씨(42)는 『근처에 사는 두 여동생도 시댁조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며 『하도 문제가 많아 한국의 친척이나 친구가 아이들을 부탁하면 매몰차게 거절한다』고 말했다.<뉴욕 la="손태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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