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첫 제조업 설탕생산 “떼돈”/제당경쟁 치열/저가땐 안팔리다가 값올리자 “불티”/삼양사등 잇단 참여 시장쟁탈 혈전/제일제당 우세속 「3사정립」…「삼성제일주의」 시발3백산업의 꽃은 제당이었다. 소비재산업을 육성하려는 미국의 원조정책과 한국 기업인들의 손쉬운 소비재산업 참여가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이 땅에서 최초로 설탕생산을 시작한 것은 삼성의 이병철이다. 피란지 부산에서 무역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이병철은 53년 제조업 참여를 결심하고 일본의 삼정물산에 제약·제당·제지사업에 관한 기획과 견적을 의뢰했다. 제당의 견적서는 3개월만에 도착했고 6개월후 제약,8개월 후에는 제지의 견적서가 나왔다. 세가지 모두 수입대체산업으로는 긴요한 것이었고 수익성으로 본다면 페니실린 제조업이 가장 나아보였다. 그러나 하루가 급했다. 이병철은 제당업으로 결심하고 53년 4월 부산 피란지의 삼성물산 사무실내에 제당회사의 창립사무소를 설치했다.
53년 8월1일 이병철은 조홍제부사장,구영회전무,허정구상무,김생기·여상원·김재명을 취체역(지금의 이사)으로 경영진을 갖추고 제일제당을 설립했다. 이로써 무슨일에나 제일이 되자는 삼성의 제일주의가 시작됐다.
공장설립에 필요한 18만달러는 정부의 특별외화 대부로 마련됐고 부족자금 2천만환도 한일은행의 전신인 상공은행의 융자로 해결했다. 이병철은 공장부지를 부산시 전포동으로 정하고 기계를 일본에 발주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반일감정이 유난했던 이승만대통령이 『기계는 들여올수 있으나 기술자는 한명도 이 땅에 발 들여놓을 수 없다』고 했던 것이다. 이병철은 하는수 없이 우리기술자들을 일본에 보내 기술을 습득하도록 했다.
『작업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모르고 막히는 부분에서는 일본의 기계공급업체인 전중기계와 국제전화로 해결했다. 국제전화는 신청후 한나절씩이나 걸렸다. 서신문의는 왕복에 2주일이나 걸려 작업을 중단하고 기다리기도 했다』 이병철의 회고다.
53년 11월5일 우리 손으로 만든 설탕이 쏟아져 나왔다. 수입설탕의 가격이 근당 3백환하던 때에 제일제당은 근당 48환에 설탕을 시장에 내놓았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품질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이병철은 낮은 가격이 소비자들의 불신을 가져온다고 판단하고 가격을 근당 1백환으로 올렸다. 예상은 적중했다. 생산을 시작한지 6개월만에 공급이 달렸다. 54년 4월에는 설비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54년 한해동안 매출액은 7억2천2백만환이었고 순이익은 1억6천2백만환이었다. 매출액대비 이익률은 무려 22.4%였다. 쏟아져 나온 설탕은 그대로 돈이었다.
제일제당이 돈을 쓸어담자 너도나도 제당업에 뛰어들었다. 54년 8월 이양구가 동양제당을 설립했고 그해 12월에는 한국정당이 서울에서,55년에는 삼양사가 울산에서,56년에는 금성제당·해테제과·대동제당 등이 속속 제당사업에 뛰어들어 제당산업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다.
당시의 사업도 역시 정부의 지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부가 설비도입자를 선정한뒤 자금을 대주고 사업에 참여토록 했던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삼성이 가는 곳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경성방직과 같은 계열인 삼양사는 곳곳에서 배제됐다. 경성방직이 원면배정에서 제외됐던 것과 마찬가지로 삼양사가 제출한 제당사업 참여계획서도 웬일인지 허가가 나지 않았다.
삼양사 설립자 김계수는 회고록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삼양사가 식품공업에 진출키로 하고 정부에 외화사용을 신청한 것은 53년 초의 일이다. S사와 거의 같은 시기였다. 수입대체산업이며 한국원조에 관한 타스카보고서에서도 제당공장 건설안이 포함돼 있어 쉽게 허가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당국은 S사만을 먼저 허가해 주고 삼양사의 것은 미루었다. S사가 이미 생산을 시작했고 뒤늦게 제출한 동양제당도 허가를 받았으나 삼양사에 대한 연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한국제당을 허가하던 54년 12월에 가서야 삼양사를 허가했다. 순전히 삼양사를 야당계열시한 정부의 처사였다』
이 바람에 삼양사는 60대1의 환율을 적용하는 특혜달러 대신 3백20대 1의 높은 환율을 배정받았다. 설비의 구매지역은 또 유럽으로 제한돼 서독과 스위스기계를 도입한뒤 서독의 기술자를 초빙해 설계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겪었다.
여하튼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제당공장은 과당경쟁에 돌입했다. 7개 공장의 생산능력은 15만톤이었으나 국내 수요량은 5만톤이었다. 제당업계의 경쟁은 원당배정에서부터 일어나 원당구입달러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으로 번졌다. 제일제당 이병철은 한푼이라도 더 외화를 얻기 위해 당시 미군에 통조림을 납품하던 동성물산의 통조림공장까지 인수했다. 68년 대한종합식품으로 넘어가 운영된 펭귄표 통조림이다.
57년에 접어들자 국내 설탕시장은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과잉생산에다 원당 수입관세율이 배로 인상된 것이다. 국제 원당가격도 급등했다. 이에따라 58년 1월 동양제당이 조업을 중단했고 금성제당·한국정당·해태제과 제당부문이 잇달아 조업을 중단했다.
이로써 미국의 원조와 함께 시작된 제당전쟁은 5년도 못가 막을 내리고 현재는 제일제당과 삼양사,대동제당의 후신인 대한제당만이 남아 3파전을 벌이고 있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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