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의 눈물어린 노천수업장/가마니바닥불구 학습태도 진지/높은 향학열 외국언론 대서특필/서울서 피란 대학교수 명강의 열리기도6·25전쟁중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세대들은 대부분 신천변 자갈밭에서 받았던 노천수업을 아릿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책·걸상은 물론 벽과 지붕조차 없이 자갈밭에 가마니만 달랑 깔려져 도저히 수업이 진행되지 않을 상황임에도 언제나 뜨거운 학습 분위기가 조성됐던 임시 피란학교들은 당시 많은 외국인들로부터 찬탄과 경이감을 갖게 했으며 한국인의 교육열을 대외에 과시한 그때 그 자리이기도 하다.
『개천바닥·산등성이 등 어디든 학교는 살아 있었다. 천막에서,묘지에서도 수업은 계속됐다. 학생들은 비가 내리면 집으로 돌아갔지만 개이면 또다시 모여들었다…』
미국이 뉴욕타임스는 51년 4월23일자 지면에서 한국특파원 기사로 임시 피란학교의 수업모습을 감탄을 섞어 이같이 보도했다.
수성교에서 대봉교 사이의 신천변 1㎞ 구간의 자갈밭과 인근 과수원 등이 노천 학교터로 돌변하게 된 것은 피란민들이 대구로 몰리고 유엔군이 참전하면서부터.
일부 학교의 경우 대명동이 현 계명대 언덕배기,신천동의 현 영신중·고교 부근 기왓골 등에 판자로 얽고 군용천막을 쳐 수업을 계속했으나 미처 가교사를 짓지 못한 학교들은 신천변 자갈밭으로 모여들었다.
경북중학교는 지금의 삼익맨션과 청운맨션 사이에 임시 가교사를 짓기전까지 6개월여 동안 자갈밭에서 노천수업을 실시했다.
대구상고·경북사대부중고·대윤고 등도 「자갈밭 시절」을 보낸 뒤 수성교 서북쪽 감나무밭,남산여고 부근 밭·과수원 등에 천막 가교사를 지어 학교의 명맥을 이어갔다.
임시가교사 생활도 을씨년스럽고 불편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으나 「자갈밭교실」은 배고픔을 이겨내던 억척스런 학생들에게도 힘겨웠다.
비가 내린뒤면 바닥이 물바다가 돼 앉을수조차 없어 선채로 공부해야 했고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질땐 피할 장소가 없어 수업을 서둘러 끝내야 했다.
한겨울에는 학생들이 시린 발을 녹이려고 헤진 운동화와 고무신을 줄곧 고쳐신으며 자갈밭을 몇바퀴씩 달려 땀을 낸뒤 수업을 받기도 했다.
교무실 역시 칸으로 구획만 쳐졌을뿐 바닥이 가마니로 깔려있어 삭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졸업식도 자갈밭 학교에서 열렸다.
말썽꾸러기들은 청소할 필요도 없고 몰래 도망가고 지각해도 표시가 잘나지 않은 노천교실을 좋아했다. 그러나 수업분위기는 너무나 진지해 인근 빨래터의 아낙네들은 수업이 시작되면 빨래방망이질을 멈추거나 빨래터를 옮겨갔다.
당시 경북중에서 수학을 가르쳤던 이길우 대구시교위 의장(68)은 교직생활중 자갈밭 강의시절을 잊을 수 없다며 이같이 회상했다.
52년 경북사대부고 1회 졸업생인 이공현씨(60·대구교육과학연구원장)는 『젊은 교사 대부분이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서울에서 피란온 대학교수 등이 대신 수업,덕분에 심리학·철학 등 명강의를 듣는 행운도 얻었다』며 피란학교의 어려움을 스스로 위로했다.
51년 9월20일 대봉동 육군관사부지에 서울 피란 대구연합중학교가 들어서는 것을 전후해 신천변 가마니바닥 노천학교는 대부분 가교사를 지어 이전했다.
전쟁시절 학생들의 눈물과 추억이 담긴 신천변은 이제 대구시에 의해 종합개발되고 있다. 한때 오폐수가 코를 찔러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했던 신천은 87년부터 종합개발에 들어가 93년이면 천변 강변터는 수영장·축구장·조깅산책코스 등이 갖춰진 시민종합공원으로 새롭게 단장된다.
임시가교사들이 밀집해 있던 신천변의 과수원·밭 등은 피란민 등 저소득층의 바라크촌으로 변했다가 이제는 대구플라자 등 대형빌딩과 신세계타운·청운·삼익·오성맨션 등 고급아파트촌으로 탈바꿈하고 있다.<대구=이동국기자>대구=이동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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